“봄날 꽃이 피면 동쪽에서 목성의 기운을 가진 귀인이 와서 도와주리라.” 누구의 점에 그렇게 나오면 이 씨, 박 씨인 친구들이 서로 자기가 동쪽에 사는 귀인이라고 스스로를 높이며 웃음꽃을 피웠다. “가을날 곳간에 재물이 가득하니 근심도 가득하리라”는 점괘가 나오면 재물을 덜어야 하는 거라고, 그러니 너는 올 한 해, 밥을 많이 사야 하는 거라고 해석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한때 그렇게 놀던 시절이 있어선지 어디선가 이지함에 대한 책이나 다큐가 나오면 읽게 되고 보게 된다. 그는 대단한 학식에 엄청난 집안이었으나 장인이 역모에 연루되는 바람에 연좌제에 걸려 벼슬길이 막혔다. 처가에 닥칠 불길한 기운을 예감하고 미리 가족들을 피신시킨 일이나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언한 것은 유명하다. 그것이 점술에 의한 것이었는지, 통찰력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가 일반 서민들에 봐주었다는 신수는 단지 점술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환갑이 되도록 벼슬을 한 적이 없는 그가 그리 유명세를 탄 것은 가난했어도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품고 사는 자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막신을 신고 솥을 쓴 후에 일부러 관인들의 앞길을 가로 막고 누워 맞기를 자청했던 일도 있었단다. 그것은 당시 관리의 횡포에 맥없이 당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집에는 늘 삶이 고단하고 괴로운 사람들이 넘쳐났단다.
그 민초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을 쳐준 것이다. 보리 같은 인생이니 겨울날을 견디면 수확을 하겠다거나, 기다리면 귀인이 오겠다거나, 자식을 성인처럼 모시면 큰 인물이 되겠다거나 등등! 그것은 점이라기보다 우리 속의 희망의 불씨를 살려주는 선한 자유인의 의지였고, 점술의 이름으로 점술을 극복한 행위였던 것이다.
환갑이 넘어 그는 아산현감이 된다. 그런데 현감이 되어 그가 제일 먼저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걸인청’을 신설하는 것이었다. 그의 걸인청은 단순히 걸인들을 보호하는 시설이 아니었다. 그는 걸인들이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생업기술을 가르쳤다. 세상에 천한 일이 없다고 믿었던 그는 직접 그들을 장터로 데리고 나가 장사를 가르치기도 했단다.
서울 마포에 가면 토정로가 있다. 토정 이지함이 흙집을 짓고 살던 곳이다. 지금이야 금싸라기 땅이지만 그때만 해도 지대가 낮아 물이 자주 차는, 못 쓰는 땅이었다고 한다. 일부러 그런 땅에 집을 지어 고난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그를 낮은 곳으로 흐르고자 했던 자유인으로 여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