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 못 버린 ‘주먹’ 15년 새 삶에 마침표
▲ 지난 7월 23일 경기도 안성의 한 야산에서 경찰이 두 여성의 사체를 발굴하고 있다. 도박장에서 고리로 돈을 빌려주던 이들은 지난 3월 초 실종됐는데 채무자의 남편에게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차량이 분해되었을 가능성에 주목하여 144일 만에 범인을 붙잡았다. | ||
도대체 범인은 누구며 왜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것일까. 그동안 이들 여성들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자칫 미제로 묻힐 뻔한 이 끔찍한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데는 사소한 의문 하나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추적해 단서를 잡아낸 수사팀의 집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숨가빴던 144일 간의 수사일지 속으로 들어가보자.
지난 3월 1일 두 명의 부녀자들이 동시에 사라졌다. 안성시 낙원동에서 한 집에 함께 살던 A 씨(45)와 B 씨(45)가 그 당사자들. 동갑내기로 친하게 지내오던 이들은 수년 전 모두 남편과 이혼한 뒤 동거하고 있었다. 이들은 소위 ‘하우스’라 불리는 도박장에서 노름꾼들을 상대로 연 50%의 고리에 자금을 빌려주는 사채업을 하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살던 또 다른 여성에 따르면 실종 당일 A 씨 등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으며 특별히 이상한 낌새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들은 이날 저녁 6시 50분경 ‘지인을 만나고 오겠다’며 승용차를 함께 타고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이들은 동시에 연락이 두절됐다. 또 이들이 만나러 간다던 ‘지인’의 실체도 밝혀지지 않았다. 매일같이 붙어다니던 이들이 수일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동네사람들도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곧 돌아오겠거니’라는 생각에 기다리기만 하던 가족들은 결국 소식이 끊긴 지 나흘 만인 3월 5일 경찰에 미귀가자 신고를 하기에 이른다.
안 그래도 화성 부녀자 연쇄실종 사건으로 잔뜩 긴장해 있던 경찰은 또 다시 들려온 부녀자 실종 소식에 비상을 걸었다. 경찰은 휴대전화 위치추적으로 이들의 행방을 찾으려 시도했지만 두 사람의 휴대전화는 모두 전원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
경찰은 우선 범죄 연루 여부를 살펴보기 위해 이들의 금융거래내역을 확인했다. 그러나 실종 전후 이들의 통장에서는 단 한 건의 거래 내역도 발견되지 않았다. 실종된 지 여러 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금융거래 내역이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들이 실종 직후 무슨 일을 당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이들이 불가피한 사정상 주변사람이나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여행을 떠났거나 장기간 일을 보러 간 것이라면 경비가 필요했을 것이고 따라서 적어도 한두 차례는 현금을 인출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일이 지나도 두 사람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또 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협박전화도 없었다. 이들이 갑자기 스스로 행적을 감출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범죄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는 상황이었다. 경찰은 이들이 사채놀이를 했다는 점에 착안, 누군가 채무관계에서 비롯된 원한이나 갈등으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또 두 명을 상대로 동시에 범행을 저질렀을 경우 범인은 한 사람이 아닐 것으로 추정했다.
40여 명의 수사전담반을 편성한 경찰은 사라진 부녀자들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탐문수사에 들어가는 한편 실종 여성들과 주변사람들 간의 통화내역을 분석, 혐의점을 찾아내려 했다. 동시에 경찰은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휴대폰 통화가 이뤄진 안성시 보개면 일대를 중심으로 집중적인 수색작업을 펼쳤다. 대대적인 수색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자 경찰은 8500여 명의 전·의경을 투입해 안성천 상류 금강저수지 일대와 인근 야산 등지로까지 범위를 넓혀 수색을 실시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기만 했다.
다른 한편으로 경찰은 A 씨 등이 타고 나갔다는 차량을 찾는 데 주력했다. 이들이 납치를 당했다는 가정을 해볼 때 차량을 추적하면 범인의 동선을 그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경찰은 안성 일대 교통 CCTV를 분석하는 동시에 72개의 교통정보 수집장치(AVI)까지 일일이 확인하며 차량의 행방을 추적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었다.
수사는 이렇게 제자리걸음을 계속했다. 그러던 3월 중순경 수사팀 내부에서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다. 교통정보시스템에도 확인되지 않은 채 차량이 사라졌다는 것에 의문을 품은 것이다. 멀쩡한 차량이 공중으로 사라질 리도 없는 노릇. 수사팀은 범인이 범행 후 증거를 없애기 위해 차량을 폐기처분하거나 고의로 분해했을 가능성에 주목, 안성 일대 중고차 판매상과 폐차장을 돌아다니며 탐문수사를 벌였다.
수사팀은 차량 엔진 등을 판 사람들을 추적했고 결국 7월 21일 K 씨(44)를 포함한 관련자 4명을 찾아내 증거인멸 및 자동차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 조사에서 K 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 유 아무개 씨(47)로부터 3월 1일 저녁 9시경 차량을 없애줄 것을 부탁받았다’는 진술을 했다. K 씨의 진술에 따르면 범행 직후 차량이 폐기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유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수사팀은 그 다음날 유 씨를 검거, 범행 일체를 자백받게 된다. 5개월 가까이 계속된 경찰의 집요한 수사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간의 수사를 통해 밝혀진 범행 전모는 이렇다.
한때 안성지역의 폭력조직 P파의 조직원이었던 유 씨는 92년 조직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기술자로 일하며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어두운 과거를 털어내고 가정을 꾸린 유 씨는 여느 가장과 다름없는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아내의 도박벽 때문이었다. 수년 전부터 재미 삼아 한두 차례 동네 ‘하우스’(도박장의 속어)에 발을 들이던 아내가 급기야 도박에 빠져 수천만 원대의 큰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애초 유 씨의 아내가 도박빚을 갚기 위해 사채놀이를 하던 A 씨 등에게 2500만 원을 빌린 것이 화근이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빌린 돈이었지만 사채의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따금 돈이 생길 때마다 A 씨에게 이 돈을 건넸지만 이자를 갚기에도 부족했다. 결국 사채 2500만 원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1년여 만에 원금의 2배가 되고 말았다.
A 씨의 빚 독촉은 더욱 심해졌다. 아내가 수시로 빚 독촉에 시달리는 것을 알게 된 유 씨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보다 못한 유 씨는 아내를 대신해 A 씨를 찾아갔다. 그동안 조금씩 갚아온 이자를 제외하고 2000만 원으로 채무변제를 합의해볼 요량이었다. 그동안 틈틈이 돈을 갚아나갔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원금의 두 배를 받겠다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는 것이 유 씨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 씨의 설득은 A 씨 등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A 씨 등은 빠른 시일 안에 무조건 원금에 이자까지 합친 5000만 원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유 씨는 2000만 원을 손에 들고 네다섯 번을 찾아가서 사정을 얘기했지만 허사였다. 아내에 대한 이들의 빚독촉은 더욱 심하게 계속됐다.
도저히 돈을 갚을 상황이 안 되자 유 씨는 결국 위험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한 번 더 설득을 해보고 A 씨 등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살해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유 씨는 삼일절 저녁에 ‘아내가 빌린 돈을 갚겠다’며 A 씨 등을 안산시 사곡동의 한 야산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2000만 원으로 끝내자’고 사정했다. 하지만 A 씨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 A 씨는 오히려 담보로 잡은 집마저 경매처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A 씨의 말에 격분한 유 씨는 미리 준비해 간 엽총으로 A 씨를 죽이고 같이 나온 B 씨마저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범행 은폐를 위해 두 사람의 사체를 암매장했다.
문제는 A 씨와 B 씨가 타고 온 차량이었다. 이들의 차량이 발견되면 동선이 추적될 것이고 자연히 자신의 신변이 노출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에 유 씨는 A 씨 등을 살해한 당일 저녁 평소 알고 지내던 후배들을 불러내 차량을 분해해 폐차시킬 것을 부탁했다. 그동안 경찰이 교통정보시스템 등을 이용해 A 씨의 아반떼 승용차의 행방을 추적했으나 찾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범행 후 피살 여성들의 휴대폰과 차량 등을 ‘완벽히’ 처리한 유 씨의 범행은 이로써 완전범죄로 굳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무려 4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차량의 동선이 드러나지 않은 사실이 오히려 단서가 됐다. 차량이 분해됐을 가능성에 주목한 경찰이 부품 등의 행방을 추적한 결과 범행의 꼬리를 밟히게 된 것. 너무 완벽하게 증거 인멸을 시도하다가 오히려 경찰에 덜미를 잡히게 된 셈이었다.
경찰은 7월 23일 유 씨의 자택에서 범행에 사용된 엽총 1정과 공기총 1정, 실탄 100여 발을 압수하고 유 씨에 대해 강도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어두웠던 조직생활에서 손을 씻고 15년 가까이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온 유 씨. 뒤늦게나마 소박한 삶을 살기 원했던 그의 꿈은 살인이라는 무서운 범죄의 덫에 걸려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