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태 눈엔 동네 여자가 다 포르노걸
▲ 인천 여고생 강간살인사건 현장검증 모습. 범인은 창문으로 침입해 여고생을 욕보인 후 목을 졸라 살해했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현장에 물을 뿌리는 치밀함을 보였다. | ||
2년 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인해 한동안 형사들의 속을 새까맣게 태웠던 일명 ‘인천 여고생 강간살인사건’. 이 사건은 가족들이 함께 있는 집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더욱 큰 의문과 충격을 안겨줬다.
이번에 인천 남부경찰서 강력6팀 김학봉 형사가 전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여고생 사건’에 얽힌 일화다. 5개월에 걸친 경찰의 끈질긴 추적 끝에 검거된 범인은 그 동네 일대를 돌아다니며 ‘훔쳐보기’를 일삼던 20대 청년. 관음증이 성폭행에 이어 살인으로까지 이어졌던 셈이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김 형사는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이 사건을 되짚어봄으로써 한 청년의 ‘관음증’이 불러온 참극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또 범죄는 인적이 드문 밤거리뿐 아니라 범죄의 안전지대로 꼽히는 집 안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 그 누구든지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 또 강간은 범행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더욱 위험한 범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지난 2005년 9월 10일 인천시 남구 ○○동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의문의 피살사건이 발생했다.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A 양(당시 16세)이 자기 방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A 양의 어머니는 한참을 불러도 딸이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방 안으로 들어가 A 양을 흔들어 깨웠고 그제야 딸이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됐다.
전날밤 잠들기 전에 웃는 얼굴로 식구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방으로 들어간 것이 A 양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A 양의 느닷없는 죽음에 가족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신고를 받은 인천남부경찰서(당시 인천동부경찰서) 형사들은 즉시 현장에 출동해 초동수사를 벌였다. 다음은 김 형사가 전하는 당시 현장 상황.
“발견 당시 A 양은 마치 깊은 잠에 빠져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A 양은 반소매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채 반듯하게 누워 있는 상태로 이불까지 덮고 있었다. 누가 뒤진 것처럼 방 안이 크게 어지럽혀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렇다 할 귀중품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또 육안상으로 볼 때 A 양에게서는 폭행의 흔적을 비롯해 특별한 외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장을 꼼꼼히 살피던 우리는 A 양의 방 창문 방충망이 ‘ㄴ’ 자로 뜯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범인이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그날 새벽 도대체 A 양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부검 결과 드러난 사실은 참혹했다. A 양은 끔찍하게 성폭행을 당한 후 목이 졸려 살해된 것으로 판명 났던 것. 하지만 범인이 얼마나 치밀하게 범행을 저질렀던지 현장에서는 체모는 물론이고 지문이나 족적 등 범인을 특징지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단서는 단 하나. A 양의 몸에서 채취된 범인의 DNA였다.
즉시 30여 명의 형사들로 이뤄진 수사전담반을 편성한 경찰은 A 양의 주변 인물들과 사건 발생 지역에 거주하는 동일수법 전과자 등을 대상으로 일제히 탐문 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2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타액을 채취해 일일이 DNA를 대조했지만 용의자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A 양의 가족과 친인척은 물론이고 친구와 동네주민, 인근 불량배와 정신질환자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무려 1만여 건에 걸친 통신수사까지 병행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음은 김 형사의 얘기.
▲ 범인의 집에선 포르노테이프 60여 개가 쏟아져 나왔다. | ||
밤샘 잠복과 탐문 수사로 인해 수사팀원들이 며칠씩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비상 상황이 계속됐다. 하지만 용의자의 윤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고 수사는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러던 중 사건 발생 한 달이 지난 10월 19일 새벽, A 양의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반지하 주택에 사는 여성으로부터 ‘변태가 나타났다’는 다급한 신고가 들어오게 된다. 이어지는 김 형사의 설명.
“방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어디선가 누가 쳐다보는 느낌이 나더라는 거다. 알고보니 낯선 남성이 창문을 통해 방 안을 들여다보면서 자위행위를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는데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면서 한참을 계속 그러고 있었다고 한다. 신고를 받고 우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는데 집 앞 담장 위에 남자의 정액이 묻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채취해 왔다. A 양 사건으로 사소한 사건 하나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당시에는 이것이 A 양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단초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여성들만 사는 집을 훔쳐보며 음란한 행위를 일삼는 변태성욕자의 소행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우리는 채취한 정액을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감정을 의뢰했다.”
얼마 후 나온 국과수 분석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현장에서 채취해온 정액에서 나온 DNA와 A 양 피살사건 용의자의 DNA가 일치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용의자의 DNA는 A 양 사건이 발생하기 5개월 전에 그 일대에서 터진 또 다른 강도강간 사건 피해자의 몸에서 검출된 DNA와도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수사팀은 사건 피해자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집중 탐문한 끝에 용의자 박 아무개 씨(29)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박 씨는 A 양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단순한 절도와 폭력으로 벌금형을 받은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전과도 없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오랜 추적 끝에 수사팀이 경기도 안산에 은신해 있던 박 씨를 검거한 시기는 2006년 2월 13일. A 양이 변을 당한 지 5개월 만이었다.
박 씨는 처음에는 A 양 사건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형사들이 DNA 일치 사실을 토대로 추궁하자 이내 모든 것을 단념한 듯 자신의 범행에 대해 털어놨다. 박 씨는 컴퓨터시뮬레이션 사격장에서 근무하던 직장인으로 A 양과는 평소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박 씨는 성도착증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약 3년 전부터 여성들만 사는 집을 골라 은밀히 방 안을 엿보며 자위행위를 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남의 집을 엿보는 행위는 걸려도 사실상 큰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박 씨의 행동은 갈수록 과감해졌다. 박 씨는 단순히 남의 집을 엿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교하는 여학생들이나 길 가는 여성들을 쫓아가 자위행위를 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비정상적인 행동을 통해 성적 만족이나 쾌감을 느껴왔다고 한다. 박 씨의 이러한 행동은 범행 횟수가 늘어나면서 습관화된 것으로 보인다. A 양 사건도 이것이 발단이었다. 그날도 박 씨는 그 일대 주택가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훔쳐보기’ 대상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불이 켜져 있던 A 양의 방을 들여다보고 성욕을 참지 못해 급기야 침입,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조사 결과 박 씨는 평소 폭력적 성향의 온라인 게임과 포르노 영상물을 즐겼던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팀은 낯선 여성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변태행위를 일삼고 강간과 절도를 해온 박 씨의 범행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다.
“박 씨는 체격도 좋고 훤칠하게 잘생긴 청년이었다. 주변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박 씨는 술을 마시면 절제를 못하는 습성이 있긴 했지만 특별히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같이 살아왔는데 그다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나약한 여성을 상대로 강도행각을 저지를 만큼 쪼들리는 살림은 아니었다. 직장인인 데다가 여자친구까지 있던 박 씨가 별다른 죄책감도 없이 범행을 저질러왔던 것은 평소 그가 즐겨봐왔던 음란·폭력물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박 씨의 집을 압수수색했을 때 그의 방에서는 무려 60여 개의 포르노 테이프가 쏟아져나왔다.”
그렇다면 박 씨는 A 양 식구들이 모두 있는 집 안에서 어떻게 이런 엄청난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특히 박 씨가 A 양을 죽이기까지 한 이유는 형사들로서도 의문이었다. 이어지는 김 형사의 설명.
“대부분의 성폭행 피해자들에 따르면 막상 그런 상황에 놓이면 몸이 그냥 얼어붙는다고 한다. 갑자기 남자가 입을 막고 팔뚝으로 가슴을 누르면 대개의 경우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다는 거다. A 양도 그랬던 것 같다. 바깥에 식구들이 있어도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했던 상황이었을 게다. 박 씨에 따르면 굳이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범행 후 죽은 듯 누워 있던 A 양이 일어나서 몸을 추스르려는 것을 보고 신고하러 나가는 줄 알고 순간적으로 겁이나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씨의 범행은 단순 우발범행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주도면밀해 수사팀을 경악케 만들었다. 조사 결과 박 씨는 범행 전 A 양이 잠든 것을 확인하기 위해 네 차례가량 창문에 돌멩이를 던져 확인하는가 하면 범행 후에는 치밀한 ‘뒷처리’까지 한 것으로 밝혀져 형사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박 씨는 ‘몹쓸 짓’을 저지른 후 도망갔다가 자신의 족적과 지문 등을 없애기 위해 1.8ℓ짜리 페트병에 물을 담아 다시 범행 현장으로 와서 곳곳에 물을 뿌리고 가는 치밀함을 보였다는 것.
박 씨는 뒤늦게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지만 미처 피지도 못한 채 꺾여버린 한 소녀의 목숨과 그로 인한 가족들의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김 형사의 얘기다. 강간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박 씨는 그 뒤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