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모정’에 질려 ‘잔인한 정 떼기’
▲ 건물 2층이 허 씨 어머니가 세들어 살던 집이다. | ||
피살된 노파의 외아들인 허 씨는 평소 효심이 지극하고 성격도 온순한 것으로 알려졌던 터라 주변사람들은 그의 범행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지인들에 따르면 살해당한 허 씨 어머니는 6·25 전쟁 당시 남편과 월남해 47세라는 늦은 나이에 허 씨를 낳았다. 더군다나 남편과 사별한 후 혈육이라고는 허 씨뿐이어서 아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고 한다. 홀어머니와 늦둥이 아들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처럼 끔찍한 패륜살인이 벌어진 것일까. 이 비극의 전말을 따라가 봤다.
지난 8월 11일 양천경찰서 강력 5팀으로 한 통의 제보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의 동네에 살고 있는 한 할머니의 모습이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사실 확인을 위해 그 할머니가 살고 있다는 경기도 고양시의 한 마을로 출동했다.
할머니의 거처는 마을의 입구에 위치한 3층짜리 양옥집이었다. 1층에는 부동산과 식당이 있고 2층과 3층은 평범한 가정집인데 할머니는 2층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경찰은 집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채 일단 그곳에서 철수했다.
그로부터 3일 후 할머니를 찾으러 누군가 또 마을로 찾아왔다. 할머니의 주식을 관리하던 증권회사 직원이 고객인 할머니 집을 방문했던 것. 평소엔 전화를 잘 받던 할머니가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아 직접 찾아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집 현관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직원은 1층에 있는 부동산중개인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그 중개인은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다시 할머니의 집으로 출동한 경찰은 증권회사 직원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할머니가 무려 5억 원을 주식에 투자하고 있었던 것. 그 말을 들은 중개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을사람들은 할머니의 집안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 단순 실종사고 정도로 생각했던 경찰은 이때부터 ‘누군가 할머니의 재산을 노리고 살해하거나 납치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먼저 경찰은 할머니의 또 다른 재산은 없는지 찾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확인 결과 할머니는 서울 광화문 당주동 일대에 165.29㎡(약 50평)의 대지와 경기도 일산에 72.7276㎡(약 22평)짜리 오피스텔 등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시가로 무려 20억 원이 넘는 재산이었다.
경찰은 지난 14일 할머니의 외아들 허 씨를 애초 신고가 들어온 고양시의 한 마을로 불러냈다. 문이 닫힌 할머니의 집으로 아들과 함께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당시 아들 허 씨는 집 안을 둘러본 뒤 특별히 없어진 것이나 이상한 점은 없다며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웃 주민들의 얘기에 따르면 할머니는 평소 외출도 잘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렇게 장기간 집을 비워둘 만한 특별한 사유가 없었다. 또한 외아들을 제외하고는 연고가 전혀 없는 할머니가 아들도 모르게 어디론가 가지는 않았을 것이란 게 경찰의 판단이었다.
그러던 중 경찰은 허 씨의 부인인 A 씨(29)의 진술을 통해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하게 된다. A 씨에 따르면 모자가 다툰 다음날인 9일 밤에 남편 허 씨가 전화를 해 ‘차가 길가에 빠져 급히 견인을 해야 하니 견인비용 5만 원을 불러주는 계좌로 부쳐 달라’고 했다는 것. 허 씨가 현재 살고 있는 오피스텔 주위나 직장 주변에는 차가 빠질 만한 곳이 없다고 판단한 경찰은 할머니의 휴대폰 전원이 꺼진 포천 일대의 견인업체를 대상으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마침내 한 견인업체에서 9일 밤 허 씨의 차량인 파란색 스포티지를 견인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게다가 허 씨가 그날 밤 부인에게 불러줬던 계좌번호는 그 견인업체의 은행 계좌번호였다.
경찰은 허 씨가 노모를 살해한 것으로 보고 지난 19일 허 씨를 경찰서로 불러 혐의점을 추궁했다. 처음엔 완강히 부인하던 허 씨도 정황 증거와 형사들의 설득에 결국 모든 범행사실을 자백했다. 어머니를 해친 뒤 10여 일 동안 허 씨는 자신이 다니던 회사에 정상적으로 출근하는 등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허 씨의 부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 중 누구도 허 씨를 의심하지 않았다.
허 씨는 평생 동안 자신만 바라보며 살았던 늙은 어머니를 과연 왜 살해했던 걸까. 경찰 조사 결과 이 비극의 뒤안길에는 허 씨의 어머니와 허 씨의 부인 A 씨를 둘러싼 오랜 갈등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경찰은 허 씨가 거액의 재산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 볼 때 자신의 아내를 어머니가 끝내 외면한 데 대한 원망이 폭발해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 관계자가 전하는 비극의 전말은 이렇다.
허 씨는 동갑내기인 A 씨를 5년 전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허 씨의 어머니는 자신의 늦둥이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허 씨에게 “키도 작고 못생겼다”며 A 씨와 헤어지라고 자꾸 종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을 어머니는 결코 갈라놓을 수 없었다. 허 씨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에서 나와 A 씨와 동거를 시작했다. 일단 A 씨와 같이 살면서 어머니를 천천히 설득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허 씨 어머니의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을 A 씨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고 어쩌다 아들과 A 씨가 집으로 오는 날이면 문전박대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A 씨의 임신 소식을 전해 듣고는 A 씨를 억지로 병원으로 데려가 임신중절수술을 두 번이나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내 A 씨에게 가혹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아내에 대한 허 씨의 마음은 애틋해져만 갔다. 자신에게 시집을 와 고생만 하는 아내에게 연민과 미안함을 함께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편 A 씨는 A 씨대로 자신 때문에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가 멀어진 것만 같아 허 씨에게 항상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2년여 전 A 씨가 세 번째 임신을 했고 마침내 딸(2)을 출산했다. 딸의 돌이 지난 후엔 혼인신고까지 해서 이제 어머니의 허락만 받으면 허 씨 부부에게 부족할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허 씨 어머니는 A 씨를 며느리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외아들에 대한 집착만 커져 구박과 괄시가 더 심해졌다. 경찰의 전언에 따르면 허 씨 어머니는 평소에도 허 씨에게 ‘저 여자랑 헤어지면 내 재산 모두를 물려주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한 푼도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꺼냈다고 한다.
▲ 경찰에서 조사받는 허 씨. 아내에 대한 어머니의 반대가 계속되자 이를 참지 못하고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SBS TV 화면 캡처 | ||
일단 어머니에게는 이혼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오피스텔에 들어가 살면서 어머니를 설득하겠다는 것이었다. A 씨는 내키지 않았지만 별다른 방법도 없어 동의했다. 부부가 원치 않는 별거를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A 씨는 곧 지치기 시작했다. 남편이 보내주는 생활비로는 여자 혼자의 힘으로 젖먹이 딸을 키우기조차 벅찼던 것.
견디다 못한 A 씨는 허 씨에게 ‘8월 10일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이혼하고 친정으로 내려가겠다’라고 최후통첩을 했다. 어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던 허 씨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며칠간 고민하던 허 씨는 차마 자신의 아내와 딸을 포기할 수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마침내 지난 8일 밤 허 씨는 마음을 굳게 먹고 어머니 집으로 찾아가 힘들게 입을 뗐다.
“사실은 아내와 헤어지지 않았다. 이제 오피스텔을 나와서 아내가 살고 있는 부평으로 가겠다.”
그동안 아들이 자신의 뜻을 따르는 것 같아 흐뭇해하던 어머니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어머니는 옆에 있던 물건들을 던지며 평소보다 심하게 A 씨를 비난했다. 또 ‘더 이상 넌 내 아들이 아니다. 이제 인연을 끊자. 재산 물려받을 생각은 꿈에도 말라’는 등의 말을 쏟아내며 아들을 집 밖으로 내쫓으려 했다.
허 씨의 눈에 순간적으로 뭐가 씌운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했던 걸까. 허 씨는 마침 옆에 있던 둔기로 자신에게 고함을 치며 물건을 던지던 어머니의 머리를 내리쳤다. 77세의 노모가 허 씨의 눈앞에서 쓰러졌다. 하지만 이미 허 씨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축 늘어진 어머니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 허 씨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어머니의 목숨이 끊어진 뒤였다.
한동안 망연자실해 있던 허 씨는 자신의 차에 있던 텐트가방을 가져와 어머니의 사체를 담은 뒤 차 트렁크에 옮겨 실었다. 그리고 다음날 밤 경기도 포천으로 가 한 야산에 어머니의 사체를 암매장했다. 허 씨는 지난 19일에 있었던 현장검증에서 자신이 묻었던 어머니의 사체를 보고 뒤늦게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비극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그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기자가 양천경찰서를 찾은 21일 허 씨의 부인인 A 씨가 유치장으로 면회를 왔다. A 씨가 친정으로 내려가는 길에 들렀다고 하자 허 씨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 숙인 채 울고 있던 허 씨에게 A 씨는 ‘기다릴 테니 몸 건강해. 어머님 장례는 잘 치러줄게’라며 위로했다. 하지만 A 씨의 어깨 역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담당했던 양천경찰서의 강력 5팀 송재원 팀장은 “허 씨는 살인을 저지르기엔 너무나 착한 사람처럼 보였다. A 씨도 딱히 시어머니의 미움을 살 만한 이유가 없었는데 이 지경에 이른 게 안타깝기만 하다. 허 씨의 패륜 살인을 결코 용서할 수는 없지만 외아들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집착이 결국 그 외아들과 어머니의 인생마저 망가뜨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며 혀를 찼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