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 72학번 동기인 이해찬 총리(오른쪽)와 천정배 대표가 최근의 파행정국 때문에 감정의 골이 깊어가고 있다. 사진은 지난 5월 원내대표 경선장에서의 두 사람. | ||
세 사람은 명실상부하게 여권의 핵심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 내정을 총괄하며 역대 최강의 총리라 평가받고 있는 이 총리와 국회 과반 의석을 가진 여당의 원내 사령탑인 천 대표, 여당 대표에서 내각의 통일-외교-안보팀장을 자리를 옮긴 정 장관은 모두 여권 내에서 차기 대권주자로 꼽힌다.
‘3용(龍)’은 개인적인 인연도 남다르다. 우선 모두 서울대 72학번으로 이 총리는 사회학과를, 천 대표는 법대, 정 장관은 국사학과를 같은 해에 입학했다. 나이는 재수를 한 이 총리가 52년생이고, 천 대표는 54년생, 정 장관은 53년생이다.
이중 이 총리와 정 장관은 서울대 문리대 72학번 동기모임인 ‘마당’을 통해 인연을 맺었고, 96년 MBC앵커였던 정 장관을 정치권으로 영입한 사람이 이 총리로 둘은 서로를 ‘친구’로 부를 만큼 가깝다. 정 장관은 이 총리와의 관계에 대해 “대학에 입학한 72년은 유신이 있던 시절로 당시 학생운동 서클의 지도자였던 이 총리를 따라다니다 구치소도 가보고 경찰서도 가는 등 고생 많이 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이 총리와 천 대표간에는 ‘좋았던’ 기억 보다는 서로 ‘맞섰던’ 경험이 알려져 있다. 2001년 5월 당시 민주당에서 권노갑 전 고문 등 동교동계를 겨냥한 정풍-쇄신운동이 벌어질 당시 이 총리가 ‘친 동교동계’ 행보를 보였던 반면 천 대표는 정동영 신기남 의원과 함께 쇄신파의 중심에 서며 대립했다. 두 사람은 또 올해 5월11일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맞붙어 천 대표가 78 대 72로 승리한 바 있다. 경선 과정에서 천 대표는 이 총리를 겨냥해 “민주당 정풍-쇄신운동,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신당 창당 과정에서 이해찬 의원은 그때 마다 나의 대척점에 서 있거나 소극적이었다”며 날선 비판을 가한 바 있다.
천 대표와 정 장관은 열리우리당 내 당권파의 중추로 신기남 전 당 의장과 함께 흔히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으로 불렸다. 96년 15대 국회에 나란히 정계에 입문한 이후 정치적 고비 마다 행동을 통일해 왔다. 정 장관은 이를 두고 “천 대표를 따라다니다 쇄신운동, 정풍운동 하느라 힘들었다”며 ‘동지적’ 연대의식을 표현한 바 있다.
이래 저래 남다를 수밖에 없는 세 사람 관계가 묘해진 것은 이 총리가 지난 10월28일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 답변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라며 직설적으로 비판한 것을 계기로 국회가 파행된 후 부터다. 이 총리의 예상치 못한 강성 발언이 낳은 파장이 일파만파로 커져가면서 천 대표와 정 장관이 직-간접적으로 데미지를 입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선 이번 정기국회에서 4대 개혁과제(국가보안법 폐지-과거사 규명-사학개혁-언론개혁) 입법을 매듭짓는데 정치적 생명을 걸고 있는 천 대표로서는 한나라당이 자신들에 ‘독설’을 퍼부은 이 총리의 파면을 요구하며 장외로 뛰쳐 나가자 난감한 처지가 됐다. 협상을 측면에서 도와줘도 시원찮을 이 총리가 아예 판 자체를 깨뜨리고 나섰으니 심기가 뒤틀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천 대표측을 더욱 격앙시킨 것은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마련한 국회 파행의 해법을 이 총리가 ‘오불관언’(吾不關焉: 나와는 상관없다는 뜻)의 자세로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부영 의장과 천 대표는 이번 사태 초기 부터 “내용의 시시비비를 떠나 이 총리가 파행의 단초를 제공한 만큼 자신의 발언에 대해 유감을 표명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뜻을 공식, 비공식으로 전달했지만 별무 반응이었다.
천 대표 주변에서 이 총리에 대한 비판론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상황 전개상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하겠다. 원내대표단의 한 의원은 “이 총리가 상식밖의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다. 누가 뭐래도 사고를 친 것은 이 총리다. 그런데 당으로 옮겨 붙은 불똥을 끄느라 정신이 없는데 ‘당이 제대로 못하니까 내가 나선 것’이란 투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일부에서는 (이 총리가) 작심하고 국회 상황을 망치려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천 대표도 이 총리에 대한 불쾌감을 직-간접적으로 표명하고 나섰다. 그는 파행 나흘째인 10월31일 기자들에게 “과거에 총리가 국회를 파행시킨 사례가 있느냐”고 반문한 후 “우리나라 여야 관계는 내각이 사실상의 여당인 영국과는 다르다”며 이 총리를 겨냥했다.
▲ 서울대 72학번 동기인 이해찬 총리(왼쪽)와 정동영 장관. 상당히 가까운 두 사람 사이에 최근 ‘이해찬 대망론’ 때문에 미묘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 ||
이 총리측도 “우리도 당에 할 말이 많기는 마찬가지”란 입장이다. 기본 인식은 원내 사령탑인 천 대표 등이 4대 개혁입법을 위한 한나라당과의 협상에만 매몰된 나머지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 여당에 집중되고 있는 색깔론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정국 주도권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총리의 국회 발언에 대해서도 당 지도부가 배경에 대한 자성없이 “쓸데없이 한나라당을 자극해 국회 파행을 초래했다”는 투로 일방적으로 비난하며 ‘선 사과-유감 표명’을 압박하는데 대한 반감도 배어 있다.
이 총리는 실제 지난 2일 노 대통령을 대신해 국무회의를 주재하기에 앞서 열린우리당에서 흘린 자신의 유감 표명 주장에 강한 불쾌감을 표명했다. 그는 ‘유감 표명 얘기가 사실이냐’고 기자들이 묻자 특유의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누가?”라며 부정적으로 반문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총리와 천 대표가 격돌했던 원내대표 경선(5월11일) 당시 이 총리 지지성향을 보였던 재야파, 개혁당 그룹이 이 총리를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개혁당 출신인 김원웅 의원은 “당 지도부의 개혁적 선도성 결여가 민심이반을 초래했다”며 이 총리의 강성 행보를 거들고 나섰고, 정봉주 의원은 “이 총리의 ‘차떼기 당’ 발언은 열린우리당내에서 4대 개혁입법 완수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의원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자 두 야당과 힘을 합쳐 올해 안에 단독으로라도 개혁입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혀 오히려 지도부에 결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두 사람을 정점으로 한 계파 갈등의 양상이 현재의 국면에 투영되고 있음을 드러낸 대목이라 하겠다.
이 총리와 정 장관 사이에도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이 총리의 거침없는 행보가 당내외 친노세력에 크게 어필하면서 ‘이해찬 대망론’이 꿈틀거리면서다. 이면에는 내각에 들어간 이래 국정지지도 하락과 동반해 정 장관의 인기도가 하락하고 있는 것과 부시 대통령의 재선으로 남북-한미-북미관계의 악화가 예상되는 등 앞날이 순탄치 않아 보이는데서 오는 상대적 불안감도 녹아 있다.
열린우리당 내 정 장관의 한 측근은 “이 총리의 최근 행보를 놓고 당내에서도 ‘대망론’ ‘대권 밀약설’ 등 갖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일부에선 신행정수도 충청권 건설이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무산된 것과 관련해 노 대통령이 충남 청양 출신인 이 총리를 간판으로 내세워 충청권을 결집시켜 다음 정권 재창출을 모색하려 한다느니, 노 대통령이 이 총리 국회 발언에 대해 ‘이 총리는 정책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정치도 잘한다’며 격찬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총리에 임명될 때 부터 그랬지만 이 총리가 차기 대권 경쟁에서 (정 장관의) 무시못할 상대가 되리란 관측이 점차 힘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정 장관측의 ‘우려’를 반영하듯 친노그룹과 386그룹 일각에서도 이 총리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지고 있다. 친노 386 한 의원은 “이 총리가 이번 발언으로 당내외에서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으며 명실상부한 대권주자 반열에 올라섰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총리가 던진 메시지가 ‘노무현식’ 정면돌파인 만큼 당 지도부가 한나라당의 반발과 반대여론에 휘둘려 4대 개혁입법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여권 내 무게중심이 이 총리쪽으로 급격히 쏠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