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비는 수백만원 활용률은 0.1%
지난 13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박람회장에서 열린 ‘제27회 코엑스 베이비페어’에서 예비 부모들이 제대혈과 영유아 관련 상품들에 대해 해당 업체의 상담을 받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무관하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딸을 낳으며 제대혈을 맡겼던 한 아무개 씨(42)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씨의 딸(5)은 복합적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다. 식사를 하면 면역세포가 장을 공격하기에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한 씨 역시 딸의 발병 사실을 알았을 때 제대혈 이용을 문의했다. 하지만 병원 측에서 돌아온 답변은 “시술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워낙 희귀질환이기 때문에 임상시험조차 참여할 수 없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병에도 쓸 수 있을 것처럼 얘기했던 제대혈 은행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한 씨는 딸을 데리고 중국에서 4차례에 걸쳐 타인의 제대혈을 이식받았다. 하지만 잠시 호전되는 것처럼 보이던 병은 불과 20여 일만에 원상태로 돌아왔다. 수천만 원을 쏟아 부었지만 한국에 돌아와 다시 입원해야 했다. 한 씨는 “지속적으로 이식을 받아야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너덧 번으로는 호전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한 번에 1000만 원 가까이 하는 시술을 어떻게 계속 하겠느냐”고 말했다. 한 씨는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강조한 제대혈 은행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대형 산부인과에서는 산모들과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영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16개월 딸을 둔 이 아무개 씨(31)는 “제대혈을 맡길 생각이 없었는데 진통을 겪는 사이 가족들을 상대로 제대혈 업체에서 영업을 했더라. 분만 직전 시부모님이 와서 ‘아이를 위한 보험이다 생각하고 들자. 돈이 모자라면 보태줄 테니 무조건 하자’고 설득했다. 진통 중 씨름할 기운도 없어서 그러자고 했다”고 말했다.
현재 제대혈의 활용범위는 골수이식으로 치료가 가능한 질환에 머물러 있다. 1980년대 제대혈의 이용 가능성을 발견한 후로 다양한 질병 치료에 이용할 방법을 국내외 연구진이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임상단계인 부분이 훨씬 많다. 류머티즘, 뇌성마비 등의 난치병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논문도 발표됐지만, 실제 치료에 쓰이기까진 추가적으로 많은 검증이 필요하다.
사정이 이럼에도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는 제대혈 보관 업체는 거의 없었다. 기자가 상담을 의뢰한 A 제대혈 보관업체 상담사는 임상단계의 질병까지 모두 치료가 가능한 것처럼 홍보했다. 상담사는 “뇌성마비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1000명당 3.5명꼴로 발생한다. 우리 아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가입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불안감을 조장했다.
실제 각 제대혈 은행 홈페이지에는 선천성 대사장애, 자가면역질환, 발달지연, 버거씨병, 뇌졸중 등의 질병에 대해서도 마치 치료효과가 검증된 것처럼 홍보하고 있다. B 제대혈 은행 관계자는 “해당 질병도 임상연구 단계에 있다는 의미에서 써놓은 거다”고 말했다.
제대혈 시장에 선제적으로 뛰어든 메디포스트는 공격적 마케팅으로 한때 시가총액 1조 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기증 제대혈과 가족 제대혈의 차이점을 왜곡해 전달하는 점도 문제였다. 잘못된 정보 제공으로 엄마들 사이에 ‘내 아이에겐 본인의 제대혈이 가장 좋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이런 영업 행태를 이어가는 이유는 수익 때문이다. 업체 입장에선 한 번에 수백만 원을 주고 맡기는 가족 제대혈이 훨씬 돈이 된다. 가족 제대혈의 경우 15년 보관 서비스 기준 100만 원에서 150만 원 수준으로 보관 기간에 따라 금액이 늘어난다. 평생보관 서비스를 택하면 금액은 400만 원대로 뛴다.
맡길 땐 보관료를 한 번 내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지만 현실은 다르다. 성인이 돼 제대혈 이식이 필요해지면 본래 맡긴 한 유닛(unit)의 제대혈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치료에 필요한 세포 수가 늘어나면서 본인이 맡긴 제대혈 이외에도 추가로 타인의 제대혈을 받아야 한다.
가족 제대혈의 낮은 활용도는 수치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보건복지부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까지 가족 제대혈의 보관량 대비 활용비율은 0.1%에 그친다. 2013년 12월 기준 보관중인 제대혈은 44만 6269건으로, 이중 가족 제대혈이 90%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식 건수와 보관량 대비 활용 비율은 기증 제대혈이 훨씬 높다. 2011년~2013년 제대혈 이식 건수는 가족 제대혈의 경우 107건, 기증 제대혈은 332건이다. 보관량 대비 활용비율이 가족 제대혈은 극히 미미한 반면, 기증 제대혈은 국제 평균 활용률인 3.5%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조혈모 세포(골수에서 자가 복제 및 분화를 통해 백혈구, 적혈구 및 혈소판 등의 혈액세포를 만들어 내는 세포) 이식이 필요한 질환에 대해 가족 제대혈보다는 기증 제대혈 사용을 권장한다. 태어날 때부터 발병인자를 갖고 있다면 본인의 제대혈을 사용했을 때 재발의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골수이식학회가 2008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보관된 자신의 제대혈을 사용할 확률은 많게는 0.04%에 그친다고 추정했다. 조직적합성항원(HLA)이 맞는 기증 제대혈을 찾지 못할 경우 가족 제대혈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최후의 보루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사실이 이럼에도 제대혈 보관 업체들은 ‘이식 시 면역 거부반응이 없다’는 ‘절반의 사실’을 근거로 가족 제대혈을 권장하고 있다.
국제 의학계에서는 가족 제대혈을 맡기기보단 기증 제대혈을 활성화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2007년 미국소아과학회는 ‘잠재적인 미래의 이식을 위한 제대혈 보관’이라는 권고사항에서 가족 제대혈을 보관하는 것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반면 기증 제대혈을 맡기길 권장했다. 실제로 유럽, 미국, 일본의 경우 가족 제대혈보다 기증 제대혈 육성에 집중했다. 제대혈 이식이 가장 활발한 일본의 경우 국가적으로 기증 제대혈은행의 활성화를 위해 해마다 80억 원을 지원하고, 제대혈은행을 공공기관으로 전환해 국가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기 이전에 상업적 목적으로 제대혈 보관사업에 뛰어든 업체의 난립으로 가족 제대혈 보관이 기형적으로 많아지게 됐다. 보건복지부 생명윤리정책과 김행미 주무관은 “기증 제대혈을 홍보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 중이다. 기존 허가 업체 외에 가족 제대혈 신규사업자는 받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기증 제대혈을 현재의 2배 수준인 10만 명 분으로 늘리겠다는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가족 제대혈 보관 업체가 수익에 눈멀어 극히 적은 활용 가능성을 갖고 영업을 하는 사이, 한시가 급한 환아의 엄마들은 배신감에 떨고 있다. 백혈병 환아의 엄마인 C 씨는 “1%도 안 되는 확률을 갖고 상품을 파는 게 말이 되느냐. 아이의 생명을 갖고 도박하는 것도 아니고 수백만 원씩 하는 보관비용을 내면서도 소비자에게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않는 제대혈 은행의 상술에 정말 화가 난다”고 강조했다. 한 씨 역시 “제대혈 치료를 기대하며 쏟아 부었던 돈으로 다른 치료법을 택할 걸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자가 제대혈을 이용한 뇌성마비 치료를 연구 중인 한양대학교병원 이영호 교수(소아청소년과)는 “가족 제대혈은 향후 미래 과학 발전의 가능성을 보고 보관하는 것이다. 아주 적은 가능성에 투자할지 말지는 기회비용을 따져 고민할 일”이라고 조언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제대혈이란 탯줄과 태반에 있는 혈액 제대혈이란 탯줄과 태반에 있는 혈액이다. 예전에는 출산 후 쓸모가 없어진 태반은 버려졌지만 제대혈 안에 다량의 조혈모세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목받게 됐다. 조혈모세포는 혈액세포를 만들어내는 어미세포로, 골수에 주로 존재한다. 제대혈에서 조혈모세포가 발견되기 이전까진 고통스러운 채취과정을 감수하면서도 골수를 뽑아 이식했다. 제대혈은 채취 과정에서 산모와 아기에게 해가 없고, 골수에서 채취한 조혈모세포보다도 증식능력이 좋아 점차 이식률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제대혈 안에 조혈모세포뿐 아니라 각 신체기관으로 분화할 수 있는 어미세포인 중간엽줄기세포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양한 난치성 질환 치료 연구가 행해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운영 중인 기증 제대혈 은행은 가톨릭조혈모세포 제대혈 은행, 서울특별시 제대혈은행 등 4곳이며 보령, 녹십자 등 5개 업체가 가족 제대혈과 기증 제대혈을 함께 보관하고 있고, 7개 업체는 가족 제대혈만 전문으로 보관하고 있다. [서] |
제대혈, 맡겨? 말아? 소아마비 등 중증장애 임상연구 진행중 Q. 채취 시 신생아나 산모에게 해는 없나? 제대혈은 신생아를 분만할 때 태반이 배출되기 직전 제대정맥에 주사를 꽂아 뽑아내게 된다. 한 번에 평균 100ml 정도를 뽑게 되며 양이 너무 적으면 보관할 수 없다. 제대혈을 채취한 신생아의 경우 헤모글로빈 수치 등이 일시적으로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건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준이며, 자라면서 평균 수준을 회복하게 된다. Q. 기증제대혈은 어떻게 관리되나? 제대혈 기증을 원하는 임신부가 사전에 기증제대혈 은행에 신청을 하면 분만일 전에 채취 키트를 받게 된다. 기증제대혈 은행과 업무 협약이 돼 있는 산부인과에서 분만 시 제대혈을 채취해 제대혈 은행에 보내지게 되며, 유핵세포수, 오염여부 등을 엄격히 확인해 보관되고 관리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기증 제대혈은 제대혈치료제 등의 연구에 사용된다. 보관된 기증제대혈은 HLA가 적합한 이식 대상자에게 제공되며 기존 400만 원 가까이 됐던 제공비용은 지난해 10월 건강보험이 적용되면서 10만 3000원 수준으로 줄었다. Q. 가족제대혈 사용방안 정말 없나? 소아마비, 발달지연, 소아당뇨 등에 대해 자가 제대혈을 이용한 임상연구가 가톨릭병원, 한양대학교병원, 차병원 등에서 진행 중이다. 또한 혈액 관련 질환(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 등에 대해 가족 제대혈에서 추출한 조혈모세포를 이식한 사례가 일부 있다. [서] |
기형적 제대혈 산업 ‘왜 이지경까지’ 불법매매·리베이트…나랏님은 나몰라라 제대혈 보관 업체들이 산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든 건 2000년대 초반이다. 1999년 황우석 박사가 젖소 체세포 복제를 성공했다고 주장하면서 세간에 줄기세포라는 네 글자가 심어지게 됐다. 비슷한 시기에 줄기세포를 연구하던 알엔엘바이오, 메디포스트 등의 업체가 주목받게 됐다. 업계가 빠르게 레드오션으로 바뀌면서 부작용은 속출했다. 2005년에는 일부 병원이 제대혈 보관업체에 제대혈을 불법 매매한 사례가 적발됐다. 또 산부인과 안에서 임신부를 상대로 영업을 하는 대가로 제대혈보관 업체가 의사에게 과다한 리베이트를 제공하는 점도 문제가 됐다. 또 업계 1, 2위를 다투던 히스토스템이 경영주의 횡령으로 상장폐지 되면서 무허가 상태 영업을 지속해 업체에 제대혈을 맡긴 엄마들이 속을 태웠다. 가족제대혈 보관 업체들이 대대적인 경쟁에 나서는 사이, 산모들의 ‘선의’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기증 제대혈 보관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복지부가 관련 산업 정비에 나선 건 2010년에 이르러서다. 이전까진 제대혈 관리 표준지침을 마련해 제대혈 은행에 권고했지만 강제성이 없어 무용지물이었다. 학계에서 과열된 가족 제대혈 시장에 문제를 제기했고, 복지부는 뒤늦게 관련 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해 2011년에서야 제대혈 관리 및 연구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취재과정에서 마주친 제대혈 사업에 관한 국가적 노력은 아직 갈 길이 멀어보였다. 제대혈 법이 입법된 후로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제대혈 업계 현황을 지켜보는 국회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복지부는 가족 제대혈보다 기증 제대혈 육성 방안을 고심하는 중이라고 했지만 눈에 띄는 홍보 방안이나 개선 노력이 없어 아쉬운 지점이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