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길 땐 귀족노릇, 작업 땐 걸인행세
엄청난 피해액도 놀랍지만 이 사건에서 드러난 더 기막힌 사실은 김 씨의 이중생활이다. 경찰조사 결과 밤에는 빈집을 털었던 김 씨가 낮에는 고급 외제차량을 굴리며 한 수출업체의 재무이사로 행세,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 씨의 이중생활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몇 년간 함께 산 김 씨의 동거녀조차 그의 진면목을 몰랐다고 한다.
꼬리가 길면 결국 밟힌다고 했던가. 김 씨가 경찰에 검거된 것은 순전히 꼬리가 길었기 때문이다. 김 씨는 부유층이 많기로 유명한 서울 강남지역의 한 주택가의 담장을 넘어 나오다 순찰을 돌던 인근 지구대 경찰에 발견돼 곧바로 검거됐다. 강남경찰서에 인계된 김 씨는 현행범으로 잡힌 만큼 “이번이 처음”이라며 범죄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다고 한다.
동종전과 7범이었던 그가 ‘다시 절도에 손을 댄 이유’는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 담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당시 그의 행색도 그의 말을 뒷받침할 만큼 충분히(?) 초라해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은 곧 김 씨의 진술에서 앞뒤가 안맞는 부분을 발견한다. 우선 김 씨의 거주지가 경기도 구리시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차도 없다는 김 씨가 단 한 번 빈집을 털기 위해 구리시에서 강남까지 왔다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탐문결과도 똑 같았다. 그가 거주하고 있다는 사글셋방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김 씨를 끈질기게 추궁했고 결국 그의 기막힌 ‘이중생활’이 세상에 드러났다.
경찰 조사로 베일을 벗게 된 김 씨의 ‘비밀’은 놀라웠다. “형편이 어려워서 도둑질을 하게 됐다”고 자백한 그가 실제로 살고 있던 곳은 잠실 지역의 고가의 아파트였다. 구리시에 사글셋방을 얻어 놓았던 것도 경찰에 잡혔을 때를 대비, 생활고형 범죄자로 꾸며 형을 감면받아보려는 속셈 때문으로 드러났다. 김 씨의 집엔 고급 소파, 대형 TV 등 온갖 값비싼 물건들이 많았고 심지어 고가의 양주들을 진열해놓은 개인 바까지 있었다고 한다.
김 씨는 집도 동거녀 명의로 빌렸다. 112㎡(약 38평)에 이르는 고급 아파트로 보증금 1억 원에 월세 200만 원. 김 씨는 동거녀에게 월 1000만 원에 이르는 생활비를 줬고 고급 외제승용차인 ‘렉서스’를 선물하기도 했다. 밤에는 고급 룸살롱을 다니며 훔친 돈을 유흥비로 흥청망청 써 왔다고 한다. 그동안 장물을 처분해 받은 수십억 원의 ‘수익금’도 모두 차명 계좌를 이용해 관리해 왔다고 한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상당히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우선 2년여간 빈집털이를 해왔음에도 주변에서 그의 범행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동거녀조차도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고 하니 그의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을 감춰왔는지 짐작케 한다. 또 그의 집에서는 단 하나의 장물도 나오지 않았다. 동거녀는 김 씨를 한 수출업체의 재무이사로 알고 있었고 일가친척과 친구들도 ‘이사님’으로 부르고 있었다.
범죄수법에서도 그의 치밀함은 드러난다. 저녁시간에 자신의 BMW 승용차를 타고 강남의 고급 빌라 지역으로 이동한 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불이 꺼진 아파트나 빌라, 주택 등을 털었다는 김 씨. 하지만 김 씨는 불이 꺼져 있는 집이라고 무작정 들어가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돌을 던져 집 안에 정말 아무도 없는지 수차례 확인하고 나서야 범행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
BMW 승용차를 이용한 부분도 계산된 것이었다. 부유층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집을 털기 위해서는 그곳 주민처럼 위장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 때문에 고급차를 선택했다는 것. 또한 경찰의 감시를 벗어나는 데에도 고급차가 더 유리하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치밀함에 비해 김 씨가 범행에 사용했던 도구는 의외로 ‘초라’했다. 일반 일자형 드라이버 하나와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김 씨는 주로 1~2층 빈집만을 골라 털었는데 드라이버는 잠금장치를 푸는 데, 가방은 집에 들어간 뒤 금품을 쓸어담는 데 사용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가 ‘한탕’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부피가 큰 물건은 절대 훔치지 않고 귀금속과 현금만을 노렸기 때문에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 또한 김 씨는 180㎝가 넘는 장신이었던 탓에 베란다를 통해 2층 집에 올라가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김 씨는 집을 턴 후에는 반드시 다시 베란다를 통해 범죄현장을 빠져나왔다는데 그 이유는 CCTV 때문.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2년여 동안 49차례에 걸쳐 범죄를 저질러 왔지만 CCTV에 포착된 것은 지난 3월 단 한 차례뿐이었다고 한다.
김 씨가 이렇게 2년 동안 훔친 금품은 90억여 원대로 전해지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신고하지 않은 피해자와 밝혀지지 않은 범죄까지 감안해보면 100억 원은 족히 될 것”이라고 말했다. 49차례에 걸쳐 범행을 저질렀다는 김 씨의 자백이 사실이라면 김 씨는 범행을 한 번 저지를 때마다 평균 2억여 원에 이르는 금품을 훔쳤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찰조사 결과로는 김 씨가 장물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은 10억 원 안팎에 불과하다. 김 씨가 장물들을 ‘장물아비’에게 싼값에 처분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사 중인 차명계좌가 남아있어 김 씨 전체 수입을 단정짓긴 이르다고 경찰은 말했다. 경찰은 장물아비의 신상에 대해서도 조사 중이지만 김 씨가 다른 건 다 말하면서도 유독 장물아비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만큼은 입을 다무는 의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후문이다.
밤에는 강남으로 ‘출장’을 다니며 ‘고정수입’을 얻고, 낮에는 어엿한 기업의 이사로 행세하며 재벌 부럽잖게 살아왔던 김 씨. 현행범으로 붙잡혔어도 자칫 생활고에 시달리다 담을 넘은 잡범으로 분류될 뻔했지만 경찰의 끈질긴 추적으로 이중생활이 드러나고 말았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