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이 거둔 가장 최근의 안보적 성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해산된 통합진보당 실체를 밝혀낸 것이다. 국정원이 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일이다. 원세훈 사건의 발단이 된 18대 대선기간 중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직원들이 저지른 댓글 사건은 국정원 본연의 일과는 거리가 있다.
원 씨는 2심 판결 후 “국가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 말했다. 원 씨와 함께 유죄판결을 받은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은 재판에서 “군대는 전쟁을 준비하는 곳이지만 국정원은 전쟁을 수행하는 곳이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들이 주로 댓글을 올린 인터넷 공간은 터무니없는 비방이나 선동이 판치는 이른바 ‘좀비 사이트’들이었다. 국정원은 이런 사이트를 청소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지언정 그런 곳에 드나들며 그들과 똑같은 어법으로 특정 정당, 특정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올려서는 안 된다. 이미 오염된 인터넷 공간에 오염을 더할 뿐인 행위를 국가가 세금을 들여서 할 일은 아니다.
허위사실을 유포해서 남한 내 국론분열 노리는 것은 북한의 오래된 대남공작 수법이고, 인터넷 시대를 맞아 그런 공작은 날로 광범하고 교묘해지고 있다. 국정원이 이런 것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대응은 그만큼 정교해야 한다.
북한의 지령을 받는 간첩도 있을 수 있지만 자생적인 극좌 극우세력과 함께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이 공존하는 여론의 하수구 같은 곳이 인터넷 공간이다. 이 중에서 북한의 지령에 의해 허위정보를 유포, 국민의 건전한 여론 형성을 방해하는 세력을 찾아내는 것이 국정원의 할 일이다. 거기에서 자칫 벗어나면 인권을 억압하는 것이다.
2심 재판부도 그 점을 들어 국정원이 국민의 의사형성 과정에 편파적으로 개입했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다지만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를 훼손했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에서 또 하나 유의할 점은 국정원 지휘부의 댓글 공작이 국가의 안위를 빙자한 개인적 보신 행위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정권이 바뀌면 지휘부가 대거 물갈이 되는 곳이 국정원이었다. 같은 성향의 정권에서도 그랬을진대 보수 진보 간의 정권교체는 보복성 인사가 가미돼 그 폭이 컸던 것이 과거의 예였다. 댓글 사건엔 그런 강박이 작용됐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국정원법은 직원의 정치개입 금지와, 정치적 중립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나 지휘부의 지시 한마디로 쉽게 위반될 수 있는 취약성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의무를 확보할 근본적인 법적 보완책도 강구될 필요가 있다.
임종건 언론인·전 서울경제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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