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홧김에 살해’ 후 토막패륜 모방
▲ 2000년 6월 10일 보라매공원 토막살인 사건의 용의자 현장 검증 장면. | ||
“이런 데다가 쓰레기를 봉투째 버리다니…. 참으로 양심도 없는 사람이구먼!”
A 씨는 누군가 버린 쓰레기봉투를 치우기 위해 덤불을 넘어 화단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곧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쓰레기봉투의 찢어진 틈 사이로 사람의 다리가 삐죽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9년 전 발생한 일명 ‘보라매공원 토막살인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수사기록 속으로 들어가보자.
신고를 받은 경찰이 즉시 출동했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
“쓰레기봉투 안에는 여성의 골반과 두 다리, 손목이 들어 있었다. 토막살인사건이었다. 절단된 사체는 깨끗이 씻겨져 있는 상태로 얼핏보면 마네킹을 연상케했다. 사체로 보아 피해자는 대략 30대 중반~40대 후반의 여성으로 짐작됐지만 현장에는 피해자의 신원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나머지 사체토막을 찾아 신원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수사팀은 즉시 현장 인근에 대한 수색에 들어갔다.”
현장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던 수사팀은 사체 토막이 처음으로 발견된 곳에서 약 250m 떨어진 도림천 지류에서 역시 쓰레기 봉투에 쌓여있는 토막 사체 일부를 추가로 발견했다. 쓰레기봉투 안에는 양 손과 코가 들어있었다.
모두 동일인의 사체 토막임을 확인한 수사팀은 손에서 지문을 채취, 신원확인에 들어갔다. 조사결과 피해자는 서초구 방배동에 사는 양경자 씨(가명·39)로 드러났다.
놀라운 것은 양 여인이 3명의 자녀를 둔 주부라는 사실이었다. 살인 후 사체를 토막내거나 훼손하는 것은 범행을 은폐할 목적으로 이뤄지기도 하지만 극도의 원한이나 증오에 의한 범행인 경우도 상당수였다.
그런데 다음날 양 여인의 나머지 토막 사체가 추가로 발견됐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6일 오후 3시 50분께 관악구 신림4동에 소재한 교회 뒷 주차장 부근에서 양 여인의 머리와 몸통이 발견됐다. 인근에서 놀던 동네 아이들이 ‘마네킹 같은 것이 버려져 있다’고 신고가 들어와 가보니 절단된 사체가 버려져 있었다고 했다. 이로써 양 여인의 사체는 이틀 만에 모두 발견됐다. 수거된 양 여인의 사체는 머리와 골반 몸통 등 크게 일곱 부분, 열 토막으로 잘려 있었는데 모두 깨끗이 씻겨진 상태였다.”
도심 한복판에서 연달아 발견된 토막 사체로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도대체 누가 양 여인을 살해했으며 범행 동기는 무엇일까. 수사팀은 통상적인 수사절차에 따라 우선 양 여인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조사에 들어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격자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사체 상태로 보아 1~2일 전에 살해됐을 것으로 추정한 수사팀은 그 무렵 사체가 발견된 현장에 나타난 수상한 사람을 봤다는 목격자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목격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사팀이 주목한 것은 사체 토막들이 발견된 장소였다. 머리와 몸통이 발견된 곳은 전날 양 손이 발견된 곳과 불과 1.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수사팀은 사체가 차례로 발견된 세 곳이 가까운 거리라는 점으로 미루어 범인이 모처에서 양 여인을 살해한 뒤 사체토막들을 차량에 싣고 다니며 순차적으로 버리고 달아났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수사팀은 그 어느때보다 목격자가 중요하다고 보고 현장 주변에 사는 주민 등을 상대로 탐문조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양 여인은 지난 4일 정오경 집을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결과 양 여인은 여느 주부들처럼 평탄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양 여인은 평소 남편 B 씨(43)와 심각한 갈등을 겪어왔는데 지난 98년 여름께 가정불화 끝에 남편이 가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양 여인은 미용실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중학생·초등학생 등 3명의 남매를 키우며 전세 3000만 원짜리 다가구주택에서 빠듯하게 살아왔다.
수사팀은 우선 가출한 양 여인의 남편 B 씨의 신병을 확보, 행적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별거 중이었던 B 씨는 사건 발생 무렵 확실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었으며 아무런 혐의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조사결과 양 여인은 당시 상당히 복잡한 남자관계에 얽혀 있었다. 당연히 수사팀이 수사선상에 올린 이들은 양 여인과 가깝게 지냈던 남자들이었다. 양 여인이 그간 여러 명의 남자들과 교제를 해왔다는 정황을 잡은 수사팀은 치정살인사건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양 여인의 남자들을 상대로 탐문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에게서도 특별히 수상한 점은 드러나지 않았다.
수사팀은 사건 발생 전 양 여인의 휴대폰에 음성메시지를 남긴 내연남(40)을 상대로 조사를 벌이기도 했으나 역시 아무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해 귀가조치했다.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수사팀은 범인을 특징지을 수 있는 사소한 단서라도 찾기 위해 매달렸다. 사체 토막들이 담겨져 있던 쓰레기봉투 겉면에 쓰인 ‘영등포구청’이라는 표기에도 당연히 주목했다. 따라서 수사팀은 신길동과 여의도를 아우르는 지역, 즉 사체 발견 현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범행이 이뤄진 뒤 유기됐을 것으로 보고 그 일대 동종범죄 전과자나 우범자 등을 중점적으로 탐문했다.”
유력한 용의자의 윤곽이 드러난 것은 사건 발생 사흘 후였다. 양 여인의 휴대전화 사용내역을 추적하던 수사팀은 범행 직전으로 추정되는 4일 오후 양 여인과 세 차례에 걸쳐 통화한 남성의 신원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의 남성은 양 여인과 내연관계에 있던 김종록 씨(가명·30)였다.
하지만 수사팀이 김 씨의 주거지를 찾아갔을 때 김 씨는 그곳에 없었다. 그는 이미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김 씨를 추적하던 수사팀은 8일 오후 3시경 경기도 안양시 호계동의 한 모텔에 투숙해 있는 김 씨를 긴급체포했다. 김 씨는 완강히 반항하며 범행사실을 부인했으나 수사팀이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그는 사망 직전까지 양 여인과 같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모르쇠로 부인하던 김 씨는 결국 범행 무렵 알리바이를 증명해내지 못한 채 수사팀의 추궁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김종록은 특수강도 등 다수의 전과가 있었고, 여자관계가 상당히 복잡했다.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특별한 직업이 없이 살아온 그는 유흥업소나 술집 등에서 만난 유부녀들과 비밀스런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사망한 양 여인도 그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김종록은 주로 연상의 가정주부들과 대범하게 밀회를 즐겨온 것으로 드러났는데 체포 당시에도 또 다른 내연녀인 가정주부(32)와 함께 모텔에 투숙 중이었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또 다른 내연녀와 대낮부터 모텔을 돌아다니며 밀애를 즐기고 있는 청년의 뻔뻔한 모습에 수사팀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수사팀은 김 씨의 집에서 범행에 사용한 흉기와 피살된 양 여인의 스타킹과 내의, 속옷 등의 증거품을 찾아냄으로써 수사를 종결지었다.
그렇다면 김 씨가 내연녀 중 한 명이었던 양 여인을 살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김 씨에 따르면 두 사람은 그해 초 서울 시내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알게 된 사이였다. 양 여인이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많았지만 김 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특별한 직업도 없고 수입도 없었던 김 씨는 한가한 가정주부들과 은밀한 만남을 이어오며 이따금 용돈도 받아쓰는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깊은 관계로 발전한 두 사람은 수개월째 내연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얼마 전부터 순탄치 않았다. 발단은 돈이었다. 김 씨는 몇 달 전 양 여인의 부탁을 받고 900만 원을 빌려줬으나 양 여인이 돈을 갚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두 사람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날도 두 사람은 돈 문제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4일 밤 9시경 김종록은 양 여인을 신길동에 있는 자신의 자취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도대체 돈을 언제 갚을 거냐. 나도 빌린 돈이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 더는 못 기다린다. 당장 돈을 갚아라’고 독촉을 했다. 그러나 양 여인이 ‘돈이 없는데 어떡하냐. 맘대로 해라’며 빚을 갚을 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 문제로 두 사람은 장시간 심하게 다퉜다. 하지만 양 여인은 빚을 갚겠다고 하기는커녕 되레 협박을 했다고 한다. 1999년 겨울 교도소에서 출소한 김종록은 당시 두 건의 사기혐의로 수배 중이었는데 이 상황을 알고 있던 양 여인이 오히려 그것을 약점으로 잡아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큰소리를 쳤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다툼은 결국 몸싸움으로 번졌고 ‘수배자’ 운운하며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는 양 여인의 태도에 격분한 김 씨는 양 여인을 흉기로 마구 찔러 살해하고 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현장을 수습한 김 씨는 사체처리를 위해 한동안 고심했다. 온전한 사체를 운반·유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판단한 김 씨는 결국 그날 새벽 양 여인의 사체를 총 열 토막으로 절단한 뒤 쓰레기봉투 세 개에 나눠담았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다니며 인적이 드문 세 곳에 사체를 유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이 사건은 명문대 휴학생이 부모를 토막살해한 엽기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열흘 만에 발생해 사건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민들에게 더욱 큰 충격을 안겨줬다. 실제로 김 씨는 잔혹한 범행수법에 대해 “최근 아들이 부모를 살해한 뒤 토막내 버린 사건을 보고 사체를 토막내기로 결심했다”고 언급, 모방범죄의 심각성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 등으로 기소,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 씨는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사람을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한 행위는 끔찍한 범죄지만 조금이라도 개전의 정(잘못에 대한 뉘우침)이 있다면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 사형은 형법에서 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므로 선고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