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관 내정했다 급하게 돌려막기
2월 27일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이병기 국가정보원장. 사진은 지난해 7월 당시 이병기 국정원장이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하는 모습. 연합뉴스
<조선일보> 보도 내용의 사실 여부조차 확인이 되지 않자 기자들의 스트레스는 더욱 고조됐다. 한 출입기자는 “회사 데스크로부터 ‘물 먹은 것으로도 모자라, 사실 확인도 못하느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고 하소연했다.
오전 8시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의 백브리핑은 기자들의 초조함과 혼란을 더욱 부채질했다. 민 대변인은 이날 중 김 전 실장 후임자가 발표되는지에 대해 “그럴 것 같다”고 답해놓고, 발표 시기가 오전인지 오후인지에 대해서는 “오후가 될 것 같다”고 답했다. 앞서의 기자는 “그 날 발표한다는 것은 후임자가 정해졌다는 건데 오후에 발표한다는 건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며 “현명관 내정설을 믿기도 어렵고 안 믿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설상가상으로 첫 보도 주인공인 <조선일보>가 인터넷 판에 ‘단독’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청와대가 현명관 회장에게 비서실장 내정 사실을 통보했다는 보도를 올렸다가 내리고, 다시 이병기 국가정보원장이 비서실장에 내정됐다는 보도를 올리는 등 오전 내내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하는 행태를 보였다.
결국 이날의 혼선은 오후 2시 민경욱 대변인이 인사 결과를 공식 발표하면서 일단락됐다. 내용은 대통령 비서실장에 이병기 국정원장이 임명됐고, 국정원장에는 이병호 전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이 내정됐다는 게 골자였다. 민 대변인은 또 윤두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김상우 사회문화특보로 교체되고 새누리당 주호영·윤상현·김재원 의원이 정무특보에, 김경재 전 의원이 홍보특보에 각각 임명됐다는 소식도 발표했다.
이날 인사 발표를 둘러싼 혼란과 실제 인선 발표 내용은 지지율 붕괴로 나타난 최악의 정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가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 그 중에서도 인사 난맥상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재확인시켜 줬다. 집권 3년 차를 맞아 새 출발을 알리는 동시에 싸늘해진 민심을 다독일 만한 참신한 인사, 통합형 인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회전문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법한 ‘돌려막기 인사’, 민도에 한참 못 미치는 인사들을 고집하는 ‘오기 인사’, 청와대 수석들조차도 내용을 모르는 ‘나 홀로 인사’ 등 그동안 박근혜 정부 문제점으로 지적돼 온 인사 행태가 되풀이됐다. 애초 취지는 청와대·정부 등 여권 전반에 걸친 인적쇄신이었지만 새누리당에서조차 “도대체 뭘 쇄신했느냐”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인사에서 최악의 정치적 위기 속에도 인재풀을 넓히기는커녕 ‘쓴 사람만 또 쓰는’ 회전문 인사의 전형을 보여줬다. 이병기 신임 실장은 박근혜 정부 출범 2년 만에 주일대사, 국정원장, 대통령 비서실장 3가지 보직을 거치게 됐다. 비서실장 인사가 인적쇄신의 화룡점정이 돼야 한다던 외부의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홍보수석에 김상우 사회문화특보를 수평이동 시키고 정무특보에 주호영·윤상현·김재원 여당 지도부 출신 의원들을 기용한 것도 회전문 인사의 또 다른 사례란 평가다.
지난해 7월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국정원장 임명장을 받는 이병기 원장. 연합뉴스
특히 이런 인사를 통해 박 대통령이 국가기관과 조직의 안정성을 크게 해쳤다는 비판이 터져 나오고 있다. 현직 국정원장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차출한 초유의 인사 결과에 여권 관계자들조차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내놨다. 특히 이병기 실장이 지난해 7월 국정원 개혁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투입됐다는 점이 더 많은 비판을 낳고 있는 요인이다.
새누리당 한 중진의원은 “비서실장이든 수석이든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라는 점에서는 똑같다”며 “대한민국 안보를 책임지는 정보기관장 자리가 비서 차출에 동원될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건지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시하는 것이야말로 보수의 기본인데, 이번 인사는 이런 기본을 망각한 것”이라고 힐난했다.
국정원 고위 간부 출신의 한 인사도 “국정원이 하루아침에 청와대 비서실 산하기관 수준으로 떨어졌다”며 “지금의 청와대 사람들이 과연 국가 경영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병기 실장 임명 때까지 대통령 비서실장 자리가 ‘법적으로’ 비어 있었던 사실이 새롭게 확인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번 인사 과정에서 김기춘 전 실장 사표가 2월 24일 오후 수리됐고, 그 즉시 김 전 실장이 면직 처리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병기 실장이 2월 27일 오후 정식 임명됐으니 만 3일 동안 대통령 비서실장은 공석이었다는 얘기다. 새누리당 중진 의원실의 한 고참 보좌관은 “전방 부대의 사단장이 3일 동안 유고 상태였다면 국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느냐”면서 “이번 사태를 보면서 국민들은 ‘대통령 비서실장은 며칠 동안 비어 있어도 상관없는 자리냐’고 의아해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명관 마사회장은 신임 비서실장 임명 당일 오후 갑자기 내정이 취소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준선 기자
새누리당 친박계 한 의원은 “현명관 회장에게 비서실장 내정 통보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전했다. 그는 “사실상 현명관 회장이 차기 비서실장으로 확정된 상태에서 뭔가 중대한 상황변화가 생긴 것 같다”고도 말했다. 비서실장 얼굴이 막판에 갑자기 바뀌었다는 의미다. 이병기 실장도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비서실장 제안에 대해 “여러 차례 고사했다”고 밝혔다. 거듭 고사했으나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에서는 “대통령 비서실장 인사가 막판에 황급히 뒤집힌 것도 문제이지만 현명관 회장이 마지막 순간까지 유력한 카드로 검토됐다는 것은 청와대의 인사검증 기능이 작동되고 있는지 의심케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인터넷으로 관련 기사만 찾아봤어도 현 회장의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비판이다. 실제로 현 회장은 올해 한국 나이로 75세의 고령일 뿐 아니라 자신과 장남이 모두 병역 면제된 게 진작부터 논란이 됐던 인물이다. 새누리당의 한 보좌관은 “현 회장과 장남 모두 입대를 미루고 미루다 나이가 들어 ‘소집면제’된 케이스”라며 “이완구 국무총리가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같은 이유로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공개리에 아들의 신체검사까지 했던 점을 생각했다면 현 회장은 절대로 발탁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현 회장은 또 제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 동생이 금품 살포 혐의로 구속됐던 전력도 있다. 현 회장은 야당으로부터 마사회장으로 일하면서 승마선수인 정윤회 씨 딸의 국가대표 선발을 도왔다는 의혹도 받아 왔다.
이병기 실장이 갑작스럽게 차출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이병호 국정원장 내정자 발탁도 갑작스럽게 이뤄진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선거캠프에서 일했던 청와대의 소위 어공(‘어쩌다 공무원’의 준말로, 당 출신 청와대 직원을 의미)들조차 이병호 내정자에 대해 “그런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고 말하고 있다. 이 내정자가 박 대통령과 이렇다 할 인연이 없을 뿐 아니라 국정원장 후보군으로 거론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병호 국정원장 내정자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병호 내정자가 지난 2009년 동아일보 기고문에서 용산참사를 폭동에 비유한 것을 문제 삼고 있다. 당시 이 내정자는 ‘용산참사, 공권력 확립 계기로 삼자’는 글에서 “용산 사건과 유사한 폭동이 만에 하나 뉴욕이나 파리, 런던 등 다른 선진국 도심에서 발생했다고 하면…”이라고 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박근혜 대통령의 이번 인사에 대해 여권 관계자들조차 ‘장고 끝의 악수’라며 고개를 흔들고 있다. 청와대에 근무하다 떠난 한 친박계 인사는 “쇄신 인사를 통해 국정 동력을 회복해 보겠다던 계획은 물 건너 갔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국정원장 내정자 등의 추가 낙마 사태가 없기만을 바랄 뿐”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여권 관계자들은 이병기 신임 실장이 김기춘 전 실장에 비해 덜 권위적이고 소통 지향형이라는 점이 그나마 이번 인사가 남긴 소득이라고 자위하는 모습이다. 이병기 실장은 한나라당(옛 새누리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맞고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던 지난 2004년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천막 당사’ 아이디어를 내 관철시킨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외교관 출신이면서도 오랫동안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은 만큼 여론 감수성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김기춘 전 실장이 불통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것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이완구 총리는 물론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와 ‘전화 한 통’으로 통할 수 있을 만큼 친분이 두텁다는 점도 이병기 실장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요인이다. 김 대표와 유 원내대표, 이 실장은 모두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체제에서부터 호흡을 맞춰 왔고 지난 2007년 대선 때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경선을 도운 ‘원박’ 멤버다. 아울러 이 실장은 국정원장 발탁 당시 제기됐던 각종 의혹과 비판을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해 한 방에 정리하는 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맞서 싸우기 보다는 자신을 낮추면서 소통을 꾀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당시 야당 청문위원들조차 “청문회를 통해 의혹들이 상당 부분 해소됐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모두 이 실장의 소통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실장도 취임 일성으로 “대통령과 국민께서 저에게 기대하시는 주요 덕목이 소통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며 “더욱 낮은 자세로 대통령과 국민 소통의 가교가 되고,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과 정부와도 더욱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는 이병기 실장의 능력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국정원 소식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지난해 이 실장이 국정원장에 발탁됐을 때만 해도 소위 ‘실세 원장’ 부임에 대한 기대가 높았지만, 기대는 이내 실망감으로 바뀌었다”며 “과연 이 실장이 대통령에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인지 의문을 떨칠 수 없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여당은 물론 청와대 참모들에게도 권한을 나눠주는 쪽으로 국정운영 스타일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병기 실장 장점도 사장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을 낳는 대목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