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애인 회사돈으로 태국 부인 땅 사줬다
연탄공장으로 출발해 인터넷 설비 관련 IT 전문 유통업체로 성장한 알짜 중소기업이었다. 2000년엔 코스닥 상장까지 성공해 탄탄대로를 걸었다. 하지만 창립 40주년이었던 2009년부터 회사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군가에 의해 지속적으로 회사자금이 빠져나간 것. 무려 5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진행된 ‘회사자금 빼돌리기’는 지난해 1월에서야 적발됐는데 그 금액이 약 60억 원에 달했다.
피해금액이 자기자본대비 27.1%에 달하는 액수라 건실했던 회사가 한순간에 자금난에 빠져 허덕거렸다. 주식거래가 중지됐고 상장폐지 심사까지 받았다. 투자자들의 항의가 계속 되자 회사 측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돈을 회수하겠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경찰의 수사 결과 횡령사건은 2003년 입사해 재무과장으로 일하던 이 아무개 씨(여·36)의 단독 범행으로 밝혀졌다. 오랜 기간 횡령 사실을 들키지 않은데다 금액도 엄청나 당초 고위간부가 개입된 조직적인 범행일 것이란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였다. 사건의 전모가 빨리 밝혀져 다행이었으나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거액을 빼돌린 장본인답지 않게 그의 수중에 남아있는 돈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서울강남경찰서 한 관계자는 “이 씨는 업체로부터 돈을 받아놓고도 회계장부를 조작해 미수금 처리한 뒤 빼돌리는 방식 등으로 회사자금 약 60억 원을 횡령했다. 빼돌린 돈은 자신 명의의 계좌로 이체했는데 그중 59억 원가량을 연인사이였던 남성 계좌로 다시 넘겼다. 5년 동안 총 1374회에 걸쳐 수십만 원에서 수천만 원씩 돈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 씨는 무려 5년 동안 회사자금을 횡령해 연인관계였던 박 아무개 씨(36)에게 돈을 건넸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이 씨는 지난 2009년 지인의 소개로 박 아무개 씨를 만났다. 박 씨는 태국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다 실패해 잠시 귀국한 상태였는데 두 사람 모두 기독교 신자라는 공통점으로 쉽게 연인사이로 발전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박 씨는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금이 필요하다”며 이 씨에게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이 씨는 평소 선교활동을 이유로 자주 해외에 나갔던 연인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본인이 가진 돈이 넉넉하지 않은 게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고민을 거듭하던 이 씨는 결국 회사장부에 손을 대고 말았다. 재무과장이라는 직책 덕분에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지만 박 씨의 설득과 집요한 요구에 빼돌리는 액수가 커져만 갔다.
2009년 3월부터 돈을 넘겨받기 시작한 박 씨는 시간이 흐를수록 해외에 머무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도 이 씨는 미국에서 힘들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박 씨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 씨의 말과 행동은 모두 거짓이었다. 애초에 미국에 간 적이 없는 박 씨는 이 씨가 넘겨준 돈 중 25억 원을 환치기(통화가 다른 두 나라에 각각의 계좌를 만든 뒤 한 국가의 계좌에 돈을 넣고 다른 국가에 만들어 놓은 계좌에서 그 나라의 화폐로 지급받는 불법 외환거래 수법) 업자를 통해 태국 현지은행으로 불법 송금했다. 그 돈으로 태국에서 여행사를 차려 사업가 행세를 하던 박 씨는 심지어 현지인과 결혼식까지 올렸다. 유부남이 된 이후로도 박 씨는 한국의 여자친구로부터 계속 돈을 받아 여행사 운영자금에 사용하는가 하면 태국인 부인 명의로 토지를 구입하기도 했다.
한국과 태국, 두 여자를 오가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박 씨의 뻔뻔한 사기극은 5년 동안이나 지속되다 지난해 1월에서야 꼬리가 밟혔다. 앞서의 경찰 관계자는 “거액의 자금이 개인 통장으로 빠져나가는 것에 의심을 품은 주거래은행에서 회사로 확인 연락을 하는 바람에 횡령 사실이 발각됐다. 이 씨는 경찰 수사가 진행된 후에야 박 씨가 돈을 태국으로 빼돌렸다는 걸 안 것 같았다”고 말했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이 씨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황. 그는 횡령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항소했지만 기각당해 현재 복역 중이다. 그런데 함께 벌을 받아야 할 박 씨는 이 씨가 검거될 당시 이미 태국으로 도주한 뒤였다.
이후 박 씨는 경찰의 출석요구에도 불응하며 1년 동안 태국에서 도피생활을 이어갔다. 결국 인터폴 국제 수배 및 여권사용 정지 조치 등을 받은 박 씨는 태국 이민국 경찰을 통해 지난달 10일 국내로 강제송환됐다. 이에 강남경찰서는 연인을 이용해 5년 동안 회사자금 59억 원을 빼돌려 태국계좌로 이체해 현지 사업장 운영과 토지 매입비로 사용한 혐의(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국외재산도피, 외환 관리법 위반 등)로 박 씨를 검거했다.
그런데 박 씨의 뻔뻔함은 경찰 조사에서도 계속됐다. 박 씨는 “처음부터 사업자금을 목적으로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이 씨가 알아서 돈을 마련했다”며 “이 씨가 회사자금을 횡령해 돈을 보내준 사실도 몰랐고 이체받은 돈도 25억 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 관계자는 “박 씨가 죄를 줄이기 위해 25억 원만 받았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계좌이체 기록을 보면 59억 원을 모두 받은 게 확실하다. 한때는 연인이었던 사람을 감옥에 보내놓고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에 우리도 혀를 내둘렀다”고 말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그 여직원 징역 8년 왜? 거액 횡령 가중처벌 일반적으로 횡령죄는 인간의 신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형량이 높지 않다. 하지만 일정 금액 이상을 넘어가면 가중처벌이 되기 때문에 상당히 높은 형량을 받을 수 있다. 횡령죄의 범위는 그 액수에 따라 5가지로 나눠지는데 이 씨의 경우 50억~300억 원 미만의 4단계 구간에 해당된다. 기본 형벌이 징역 4~7년인데 가중처벌일 경우 5~8년으로 늘어난다. 59억 원을 횡령한 이 씨의 경우 가중처벌 최대치인 8년을 선고받았다. 300억 원 이상의 최고단계의 가중처벌이 7~11년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형량을 선고받은 셈이다. 이 씨의 경우 사건 당시 피해를 입은 소액주주들의 항의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