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가리고 피칭’ 훈련 ‘영점’ 잡기 구슬땀도
# 강속구는 하늘이 내린 선물
굴곡진 야구인생을 거친 한 투수는 언젠가 “구속 10㎞를 늘릴 수 있다면, 남은 수명 가운데 10년을 내놓을 수 있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그만큼 강속구는 수많은 투수들의 꿈이자 로망이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선동열 전 KIA 감독은 광주일고 3학년 때 이미 시속 147㎞의 빠른 공을 던졌다. 고려대 2학년 때는 구속이 155~156㎞까지 올라왔다. 그 스피드를 프로에 와서까지 계속 유지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거의 ‘광속구’였다. 선 전 감독은 “구속은 무조건 타고나는 것 같다. 개인마다 던질 수 있는 구속의 한계가 있다”며 “프로에 와서 체중이 불면서 힘이 붙었지만, 대학 시절보다 빠르게는 던지지 못했다”고 했다. 선 전 감독은 투구 때 하체 밸런스를 이용한 중심이동이 스피드와 연결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오른손 투수의 경우 축이 되는 오른발을 중심을 두고 공중에 떠 있는 왼발을 어느 정도 앞으로 길게 가져가면서 던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설명이다. 얼핏 들으면 훈련으로 좋아질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그는 “이런 부분도 어느 정도 타고 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돌직구’가 트레이드마크인 오승환. 사진출처=한신 타이거즈
B 투수코치도 “스피드는 분명 강한 어깨를 타고 나야 한다. 투수들뿐만 아니라 야수들의 송구 능력도 마찬가지”라며 “후천적인 노력으로 늘릴 수 있는 구속은 대부분 5㎞ 안팎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140㎞의 직구를 던지던 투수가 145㎞까지 구속을 끌어올릴 수는 있어도, 150㎞을 던지기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C 투수코치도 “투구 폼을 교정하거나 근육 보강운동을 통해 4~5㎞ 정도 구속을 올리는 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는 견해. D 감독도 “강속구를 던지려면 기본적으로 어깨 자체를 타고 나야 하고, 유연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차우찬.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제구력은 노력의 산물일까
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는 “한국 투수들이 공을 던지고 난 뒤 곧바로 전광판에 찍힌 구속부터 확인하는 장면을 여러 번 봤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학창시절 “공은 무조건 빠른 게 최고”라는 교육을 받은 투수들이 유독 많다는 의미다. 그러나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직구가 130㎞를 간신히 넘는 두산 유희관이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올렸고, 직구 평균 구속이 140㎞에 못 미치는 삼성 윤성환도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인정받고 있다. ‘제구력 투수’의 가치가 재평가되는 시대다. 일반적으로 ‘컨트롤이 좋다’고 알려진 투수는 공 10개 가운데 7~8개 정도를 원하는 코스로 집어넣는 능력을 갖고 있다. 전문가들은 “구속만큼은 아니라도 제구력 역시 타고나야 하는 요소가 많다”고 얘기한다.
양현종. 사진제공=KIA 타이거즈
그러나 제구력은 훈련과 노력을 통해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KIA 양현종은 공을 던질 때 늘 앞으로 쏠리던 하체를 뒤로 당기는 훈련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제구력이 향상된 케이스다. 하체 밸런스가 좋아지면서 컨트롤도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투수 조련사로 유명한 J 감독도 “컨트롤은 밸런스가 중요하다. 후천적인 요소에 크게 좌우된다”는 입장이다. 현역 시절 칼날 같은 제구력으로 유명했던 K 코치는 “아무리 해도 컨트롤이 안 좋아지는 투수는 폼의 문제이거나 정신적인 문제일 것”이라며 “많이 던지면서 스스로 원인을 찾아내면 좋아질 수 있다”고 했다.
김성근 감독은 투수들의 제구력을 높이기 위해 눈을 가리고 던지는 훈련을 시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1월 18일 고치 스프링캠프에서 한화 김 감독이 임경완의 투구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어쨌든 컨트롤이 좋은 투수들에게는 확실한 강점이 있다. 확률적으로 강속구 투수들보다 더 오래 프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이다. 구속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줄어들기 마련. 제구력이라는 밑바탕이 잘 잡혀야 달라진 자신의 몸에 적응할 수 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유일한 200승 투수인 송진우 KBSN 스포츠 해설위원이 바로 기교파 투수로 변신해 마흔 넘어서까지 현역 생활을 한 모범 사례다. 앞서의 H 코치는 “제구력이 있고 몸 관리를 잘하는 선수들이 프로에서는 롱런하기 마련”이라며 “공만 빠른 투수들은 대부분 손으로 스킬을 습득하는 능력이 더뎌 오래 가기 어렵다”고 했다. 이유가 있다. “투수는 누구나 강속구를 원하지만, 자신의 스피드를 지나치게 믿다 보면 다른 기술에 대한 절실함이 떨어진다. 결정구로도 오로지 빠른 공을 택하려고만 한다”며 “결국은 공이 빠르든 느리든 제구가 기본이다. 둘 다 갖췄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만약 지도자로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제구력 있는 투수를 택할 것”이라고 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컨트롤 달인들의 비법 톰 클래빈은 ‘빨랫줄 맞히기’ 제구력도 타고 나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다. 그러나 선천적인 재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하다. 면도날 같은 제구력으로 유명한 투수들도 모두 최고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무수히 많은 훈련을 거쳤다. ‘한국의 그레그 매덕스’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제구력과 경기 운영능력이 뛰어난 NC 손민한은 “손 감각을 타고 났든 아니든, 일단 공을 많이 던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톰 클래빈 한 시대를 풍미한 투수 선동열은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기간에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당시 국가대표 포수인 고 심재원은 선동열보다 무려 열 살이 많은 대선배. 합숙훈련 도중 불펜에서 후배의 공을 받던 심재원은 갑자기 “지금부터 무조건 내 미트 안으로 공을 던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후배의 제구력을 잡기 위한 훈련이었다. 포수 심재원은 자신이 원하는 코스에 미트를 댄 뒤 선동열의 공이 미트 바로 옆을 스쳐도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공이 뒤로 빠져나가 백스톱까지 튕겨져 나가면, 마운드에 있던 선동열이 포수 뒤로 달려가 공을 다시 가져와야 했다. 미트 안으로 정확하게 공을 꽂아야만 선배 포수가 던져주는 공을 돌려 받을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한여름에 땀을 비 오듯 쏟던 후배는 훗날 “막상 훈련할 때는 너무 힘들었는데, 그때 제구에 대한 집중력이나 정교함이 무척 좋아진 것 같다”고 회상하게 됐다. 윤성환 국내 투수들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의 대투수 역시 더 나은 컨트롤을 위해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 한 야구기자는 2007년 뉴욕 메츠의 스프링캠프를 취재하다가 톰 글래빈의 불펜 피칭을 목격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글래빈이 불펜 양쪽에 빨랫줄 두 개를 가로로 팽팽하게 묶어놓은 뒤 끊임없이 줄의 높낮이를 조절해가면서 공을 던지는 훈련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의 대부분이 빨랫줄을 직접 맞히거나 절묘하게 스쳐 지나갔다. 집요하리만치 정확한 컨트롤로 1990년대를 장악했던 레전드 투수의 근원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은] |
꿈의 구속 ‘100마일 투수’ 채프먼 평균 구속이 ‘161km’ 시속 100마일. 한국 프로야구에서 사용하는 단위로 환산하면 약 160㎞다. 투수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구속’이다. ‘강속구’를 넘어 ‘광속구’로 통한다. 최초로 100마일 고지에 등정한 투수는 놀란 라이언으로 기록돼 있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시절인 1974년 디트로이트전에서 100.9마일(162.4㎞)짜리 공을 던져 기네스북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라이언이 100마일의 벽을 넘어선 지 27년이 지난 후, 마침내 이보다 10km나 더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탄생했다. 2010년 샌디에이고전에서 메이저리그 전광판에 무려 106마일(171㎞)이라는 구속을 찍은 신시내티 마무리투수 아롤디스 채프먼이다. 메이저리그 공식 구속 측정시스템에도 105마일(169㎞)이 나왔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이었다. 채프먼 이전에는 디트로이트 소속이던 조엘 주마야가 2007년 104마일(167㎞)의 강속구를 뿌린 게 최고 구속이었다. 그러나 잇단 팔꿈치 수술로 종적을 감춘 주마야와 달리, 채프먼은 여전히 100마일을 넘나드는 강속구를 계속 던진다. 올해는 직구 평균 구속이 100.3마일(161㎞)로 측정돼, ‘최고’가 아닌 ‘평균’ 구속 100마일을 넘긴 최초의 투수로 기록됐다. 사실 100마일 이상의 공을 던지는 투수는 대부분 보직이 채프먼과 같은 소방수다. 100개가 넘는 공을 던져야 하는 선발투수는 체력 안배를 위해 공 하나마다 전력을 다하기 어려워서다. 선발투수로 활약하면서도 102마일(164㎞)의 광속구를 뿌린 랜디 존슨이 ‘괴물’로 불렸던 이유다. 로저 클레멘스, 바톨로 콜론, C.C. 사바시아, 케리 우드 등도 100마일이 넘는 공을 던졌던 선발투수들이다. 아시아 리그인 한국과 일본에서는 ‘100마일 클럽’에 가입한 투수들이 훨씬 적다. 니혼햄의 오타니 쇼헤이는 지난해 162㎞의 강속구를 뿌리면서 요미우리 용병 마크 크룬이 2008년 기록했던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고 구속에 타이를 이뤘다. 오타니는 당시 “170㎞에 도전하겠다”는 패기만만한 소감을 밝혀 일본을 들썩거리게 했다. 오타니 이전에 순수 일본인 투수가 기록한 최고 구속은 야쿠르트 사토 요시노리가 2010년 던진 161㎞. 삼성 임창용도 야쿠르트 시절인 2009년 이틀 연속으로 160㎞를 던져 이들의 뒤를 잇는 기록을 남기고 돌아왔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공식 경기에서 160㎞를 넘긴 국내 투수가 나오지 않았다. LG 용병이었던 레다메스 리즈가 2012년 대전구장에서 161㎞를 던진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