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뱀이 홀리고 타짜가 빼먹고
▲ 영화 <타짜>의 한 장면. | ||
수도권에서 작은 건설 회사를 경영하는 A 씨(50)는 전문 경영인 수업을 들으며 인맥도 넓히기 위해 2007년 초 한 대학교의 최고경영자 과정을 밟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지인의 소개로 대형 한약재상을 운영한다는 김 아무개 씨(48)를 만났다. A 씨는 서글서글한 성격과 ‘싱글’ 수준의 골프실력을 갖춘 김 씨와 여러 차례 골프장에 함께 다니며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형님·동생’ 사이가 된 것이다.
그 해 6월 A 씨는 김 씨와 골프를 치던 중 “휴대전화를 안 가져와서 그러는데 잠깐 전화 좀 빌려 쓸 수 있느냐”며 접근해 온 여성 유 아무개 씨(36)를 만나게 된다. 늘씬한 몸매와 미모를 가진 유 씨에게 A 씨는 흔쾌히 휴대전화를 빌려주었다. 골프를 마친 후 김 씨는 A 씨에게 골프장 근처의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평소 자주 찾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긴 A 씨와 김 씨는 그곳에서 골프장에서 만났던 유 씨와 우연히 또 마주치게 된다.
유 씨는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니 같이 합석해도 되겠냐”며 은근히 작업을 걸었고 A 씨와 함께 자리에 앉아 식사를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김 씨는 A 씨에게 “유 씨 친구들을 초대해 중국으로 함께 골프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한 달 후 이들 세 명을 포함한 남녀 6명은 중국 샤먼으로 골프여행을 떠났다. 처음 이틀간 골프만 치느라 지루했던 A 씨에게 김 씨는 “여기까지 왔는데 도박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김 씨가 데려간 곳은 호텔 객실 안에 차려진 불법도박장으로 주로 바카라 등의 포커 게임을 하고 있었다. 판돈이 크지 않아 안심하며 게임에 참가한 A 씨는 김 씨와 유 씨가 권하는 술을 마셨다.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도박을 하다 A 씨는 결국 여권까지 맡기고 하룻밤 만에 9억 5000만 원의 빚을 졌다.
여권을 빼앗긴 A 씨는 다음날 자기 회사직원에게 도박장 운영자가 알려준 환치기 계좌로 2억 원을 송금하라고 연락했다. 그리고 김 씨를 도박장에 볼모로 남겨둔 채 급히 귀국해 다시 7억 5000만 원을 더 보냈다.
▲ 영화 <타짜>의 한 장면. | ||
A 씨가 믿었던 김 씨는 사기, 도박 등의 범죄로 두 곳의 경찰서에서 지명수배 중이던 인물로 본명으로 사회활동을 하기가 어렵게 되자 타인의 주민등록증, 여권, 명함을 사용해 중국으로 입·출국하는 등 다른 인물로 행세하며 사기행각을 벌여온 인물이었다. A 씨는 세관 수사과정에서 신분을 위조한 사실과 지명수배자임이 들통나 긴급체포됐다.
서울본부세관은 “지난해 10월부터 수상한 환치기 계좌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를 하던 중 치밀하고 기막힌 사기도박단을 적발하게 됐다”고 밝혔다.
서울본부세관에 따르면 사기도박단은 A 씨의 경우처럼 중국의 샤먼, 웨이하이, 하이난 등 유명 관광지내 특급호텔에 바카라 등 포커를 할 수 있는 사설 도박장을 설치한 뒤 유인책들을 재력가들이 많은 유명 봉사단체나 대학 최고경영자과정을 다니도록 하면서 중소기업 사장, 은행지점장, 벤처 사장, 건설사 사장, 개인 사업가 등에게 접근하도록 했다. 그중에서 현금이 많은 사람을 타깃으로 정하고 ‘작전’에 돌입했다고 한다.
유인책들은 국내에서 골프, 술자리 등을 함께하며 수개월간 친분을 쌓고 미인계를 이용해 남녀동반으로 중국 골프관광을 가자고 유혹했다. 이들은 관광가이드와 짜고 중국 현지 호텔 내에 사설 도박판으로 안내해 여권을 담보로 2억~10억 원씩 빌려주고 하룻밤 새 전액을 잃게 했던 것. 피해자에게 술과 함께 성분을 알 수 없는 음료수를 마시게 하여 정신을 혼미하게 한 다음, 처음에는 소액베팅으로 안심시킨 후 현금이 소진되면 여권을 담보로 칩을 빌려주어 점점 큰 액수의 베팅을 유도했다고 한다. 이들은 빈털터리가 된 피해자에게 불법 환치기 계좌를 알려주고 국내 가족·친인척에게 빌린 금액을 입금토록 한 후 여권을 돌려주고 풀어주는 수법을 썼다.
피해자들이 중도에 도박을 포기하려고 하면 유인책이 “내가 더 많이 잃었다”고 자극하거나 숙소까지 따라가 집요하게 도박을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여권을 빼앗겨 감금상태인 피해자에게 “도박과정을 모두 녹화했고 빌린 돈을 갚지 않으면 출국할 수 없다”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이들 일당은 ‘작전’이 끝난 후에는 불법 환치기 계좌로 입금된 금액을 자금세탁책이 제3자의 차명계좌를 통해 입출금을 반복, 불법수입을 세탁했으며 불법수익의 70~75%는 유인책의 내연녀 등의 차명계좌를 통해 유인책에게 분배했다. 나머지 25~30%는 총책이 챙겼고 그는 처와 아들 명의로 재산을 은닉하고 일부는 중국 내 활동자금으로 사용키 위해 다시 환치기 송금했다.
서울세관은 “피해자들이 처음에는 사회적 지탄을 받을 것을 우려한 데다 사기조직단이 협박전화도 해 도박사실을 부인했다”며 “세관이 환치기 계좌에 불법 송금된 자금의 흐름과 입출국 기록 등을 증거로 제시하자 혐의 내용을 모두 자백했다”고 밝혔다.
사건을 수사한 담당자는 “일부 피해자는 중국으로 함께 간 일행을 자신과 같은 피해자로 잘못 알고 있었다”며 “조직적인 사기의 경우 사기수법이 워낙 치밀하고 교묘해 누구나 사기도박 조직의 표적 및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해외 원정 사기도박의 경우 이들에게 속아 도박을 한 피해자들도 불법 송금 등으로 처벌을 받게 되는 만큼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