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얼굴로 바가지 씌운 뒤 늑대로 돌변
▲ 영화 <마강호텔>에 등장한 조폭 주인공. | ||
경찰 조사결과 A 씨 등이 소속된 ‘연합고흥식구파’는 과거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경찰에 의해 소탕된 폭력조직인 고흥식구파, 미아리상택이파, 이글스파 등 3개의 조직원들이 결성한 신흥조직이었다. 놀랍게도 이들은 교도소에 수감 중일 때 의기투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직원들의 잇따른 교도소 수감 등의 여파로 조직이 해체된 후 수사기관의 감시망이 느슨해지자 이들은 두목인 A 씨를 필두로 부두목과 고문, 자금책, 행동대장 등 체계적으로 역할을 분담해 새로운 조직결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새로운 조직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출소 후 세력확장을 위해 방법을 강구하던 이들은 조직을 운영할 자금확보를 목적으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그러던 중 A 씨 등은 고심 끝에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바로 호텔인수였다. 하지만 자금이 없는 이들이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최소 수십억 원에 달하는 호텔을 인수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에 이들은 ‘호텔 날로 먹기’ 작업에 착수했다.
A 씨 등이 주목한 것은 자금사정이 좋지 않거나 경영사정이 취약한 호텔이었다. 그중에서도 경매로 호텔을 낙찰받아 호텔경영에 뛰어든 신생업주들은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었다. 이들의 호텔 경영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나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노린 것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적당한 범행대상을 물색하던 A 씨 등은 지난 2007년 7월 K 씨가 강원도 인제군에서 한 호텔을 경매로 낙찰받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들은 호텔경영의 꿈에 부풀어 있는 K 씨에게 리모델링 공사 전문가로 속여 접근했다.
A 씨 등은 K 씨에게 “우리는 이 분야의 전문가다. 원래 호텔 공사비가 만만찮다. 하지만 요즘 고객들이 워낙 까다로워서 리모델링은 필수다. 자금사정을 봐서 특별히 신경써서 진행하겠다. 최저가격에 최고 수준으로 리모델링 해드리겠다”고 꾀었다. K 씨가 관심을 보이자 이들은 수시로 찾아와 공사계획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리모델링 후 완성된 도안을 내보이며 적극적인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특히 젊고 건실해보이는 청년들이 ‘아버님’ ‘사장님’이라 부르며 매번 싹싹하게 대하는 모습에 더욱 신뢰감을 느낀 K 씨는 결국 A 씨 등과 4억 5000만 원대 리모델링 공사 계약을 맺었다. 4억 원이 넘는 공사비는 K 씨에게 결코 만만한 금액이 아니었지만 영업만 개시하면 금세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계약이 성사된 직후 호텔은 예정대로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A 씨 등은 현장에 나와 감독을 하는 등 공사진행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들이 본색을 드러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어야 할 공사는 제 날짜에 이뤄지지 않았고 전체적인 공사진행 속도도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공사 수주를 맡긴 하도급업체를 계속 갈아치웠고 이 과정에서 공사비는 애초 예산을 크게 벗어났다. 안 그래도 자금이 넉넉지 않았던 K 씨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 모으느라 허덕거렸고 급기야 대출까지 받아 공사비를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급전을 끌어 위기를 넘겼지만 공사대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었다.
두 달여를 버텼지만 어느덧 공사비는 애초 예산의 두 배가 넘는 9억 5000만 원에 육박했다. 결국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린 K 씨는 청구된 공사대금을 약속기한에 입금하지 못했고, A 씨 등은 안면을 바꿔 본색을 드러냈다. 이들은 “공사비도 충당할 능력도 없는 주제에 무슨 호텔을 오픈하려 하느냐”고 K 씨를 다그쳤다.
계약 전 온갖 친절한 말로 업주를 안심시켰던 모습은 더 이상 온데간데없었다. 이들은 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차례 호텔을 찾아가 폭력을 행사하고 무시무시한 협박을 일삼았다. 싹싹하기만 했던 ‘젊은 친구들’이 돌변하자 K 씨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이들은 “공사비를 갚지 못하는 형편이니 우리가 호텔경영권을 인수할 수밖에 없다”며 객실을 무단 점거하는 동시에 K 씨를 회칼 등으로 협박, 결국 쫓아냈다.
A 씨 일당에게 호텔 인수는 누워서 떡먹기나 다름없었다. 이들의 시나리오는 너무도 간단했다. 자신들을 믿고 공사를 의뢰한 업주들을 속여 공사에 착수하는 척하다가 중간 공사 대금을 눈덩이처럼 부풀려 청구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업주들이 공사대금을 갚지 못해 전전긍긍하면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본격적인 행동개시에 들어갔다. 이들은 골프채나 회칼 등을 들고 수시로 찾아와 협박을 해대거나 호텔을 무단 점거한 뒤 업주들을 내쫓아버렸다. 대부분의 업주들은 서너 번의 협박이면 두손 두발 다 들었다고 한다.
뒤늦게 속은 것은 알아차린 일부 업주가 항의라도 하면 “우리는 합법적인 유치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호텔을 돌려받으려면 청구된 공사대금을 정해진 시일내로 가져와라. 우리가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아느냐”고 큰소리를 치면서 윽박질렀다. 예의바르고 싹싹한 리모델링 전문가의 실체가 무시무시한 어깨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업주로서는 큰 맘 먹고 인수한 호텔이 이들 손아귀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보복이 무서워 어떤 대응도 하지 못했다.
‘호텔접수’에 맛을 들인 A 씨 등은 지난해 5월 강원도 속초의 한 호텔에서도 마찬가지 수법으로 경영권을 빼앗았다. 이들이 하나의 호텔을 접수하는 데는 불과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초기에 업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공사를 하는 시늉만 했을 뿐 실질적인 리모델링 공사는 애초부터 계획에도 없었고 착수조차 하지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A 씨 등은 호텔 경영권을 뺏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객실 대여료만으로는 호텔 운영이 빠듯할 뿐 아니라 큰돈이 되지 않는다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사결과 이들은 불법으로 강탈한 호텔 두 곳에서 룸살롱과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며 16억 원 상당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일부 객실을 마사지 영업장으로 개조한 뒤 아가씨들을 고용, 불법 성매매를 알선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이들이 호텔 객실에 비밀 아지트를 만들어놓고 1년여 동안 불법 성매매로 벌어들인 돈만 1억 8000여 만 원에 달한다는 것이 경찰의 얘기다. 조사결과 이들이 공사대금을 과다계상해 호텔경영권을 빼앗고 이를 기반으로 얻은 부가수입은 총 126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기존 조폭들이 골프장이나 관광호텔 재개발 사업의 이권에 개입해 부당이익을 챙겨왔던 과거 수법과 달리 이번에는 직접 공사업체를 가장해 호텔을 통째로 삼키는 신종 수법을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경찰은 A 씨 등이 강탈한 지방의 영세한 호텔들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여죄를 추궁하는 한편 달아난 조직원 세 명을 쫓고 있다.
‘호텔 통째로 삼키기 대작전’을 시작으로 조직 재건을 갈망했던 조폭들의 야심찬 꿈은 결국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