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입사해 무려 10년간 MBC의 ‘간판급’ 아나운서로 활동한 그녀였으니. 직접 만나봐도 영락없는 ‘아나운서다운’ 모습일 거라 예상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를 눈앞에 두고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브라운관을 통해서 느껴왔던 그녀에 대한 선입견을 유지하고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나운서였던 최율미는 지난 18일 MBC 홍보심의국 홍보부로 정식 발령 받았다. 이 같은 파격적인 인사가 이루어진 것은 본인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제 홍보실 평직원으로 근무하게 된 그녀는 요즘 새 부서의 업무를 익히느라 정신이 없다. 카메라 앞을 떠난 것,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 아예 훌훌 털고 나와 속시원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
지금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편안해 보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인 것 같았다. 길어진 머리. 자신이 더 이상 반듯하고 단정한 아나운서가 아님을 ‘선포’하는 일종의 반란이 아니었을까. 썩 잘 어울리는 그녀의 긴머리를 접한 느낌은 색다른 것이었다.
딱딱하지만 먼저 일 얘기부터 꺼냈다. 아나운서를 그만 둔 것에 특별한 계기가 있었느냐고. 이미 주변으로부터 수없이 들었을 질문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녀의 유창한 말솜씨가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뭔가를 쉽게 얻으면 소중한 것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이 이제야 실감나요. 저 역시 그랬어요. 아나운서 시험에 단번에 통과한데다 인정받으며 일했는데도 어느 순간 ‘이건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그녀는 “아나운서가 우스웠다”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만큼 최율미는 카메라 앞에서 당당했고, ‘타고난 아나운서’라는 평을 들을 만큼 실력을 발휘했다. 9시 <뉴스데스크>를 맡았을 때는 저녁 시간을 고스란히 헌납해야 했다. 그런데 이도 모자라 “난 고생 좀 해봐야 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 이렇게 이미 3년 전, ‘아나운서실을 떠야겠다’고 결심한 뒤 실천에 옮기기까지의 과정을 그녀는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나갔다.
▲ 사진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매일 스튜디오에 앉아있다 보니 자꾸 성격이 폐쇄적으로 바뀌는 것 같더라구요. 아나운서라는 직업도 물론 매력이 있지만 좀 더 창조적인 일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최율미는 애초부터 ‘홍보부’에 마음을 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부터 치밀어 올랐고, 마침 이 즈음 홍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이 사건에 대해서는 밝히기 곤란하므로 양해를 바란다).결국 최율미는 자신의 결심을 지난 8월 아나운서국장에게 알렸다. 그런데 때마침 홍보실로부터 인원을 보강하고 싶으니 사람을 좀 추천해달라는 연락이 온 것.
이게 웬일! 최율미는 주저 없이 “저요, 저 갈래요”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고 한다. 그녀의 결심에 가족들은 물론, 선후배 아나운서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모두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 아니냐는 반응들이더라구요. 무엇보다 아버지를 설득하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죄송하긴 했지만 제 결심은 확고했어요.”
최율미의 아버지 최낙천씨는 성우이자 탤런트로 활동해 왔다. 최율미 스스로 “아버지는 아나운서 최율미를 만든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에게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다. 그러나 최율미는 자신의 선택에 자신이 있었다.
“죄송하지만 아버지께 통보 형식으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어요. 꾀도 좀 냈죠. 아버지가 해외여행을 앞두고 계셨는데 일부러 그때 알린 거예요. 하루에 몇 번씩 국제 전화를 하셔서 제 마음을 돌리려고 하셨어요. 저 때문에 여행도 맘 편히 못하셨을 거예요.”
어렵게 아버지의 허락도 받았지만 이후에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쉽사리 발령이 나지 않았던 것. 이미 짐도 모두 싸놓고 홍보부로 옮겨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최율미는 홍보실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그래도 홍보부 평직원 중에서는 최고참이에요”라며 웃는 최율미는 출입기자들을 ‘상대’하는 일을 주업무로 맡고 있다고 한다. 아직 전화 받는 일이나 문서를 작성하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아 다른 직원들에게 물어보기 바쁘지만 누구보다 의욕은 앞서있다고 자부했다.
그녀의 얘기 보따리는 정말 술술 풀려 나왔다. ‘아줌마’ 최율미에 대한 궁금증도 안고 있을 수만 없었다. 최율미는 기다렸다는 듯 “제 원래 꿈이 현모양처예요(웃음)”라는 의외의 대답을 한다. 요즘은 아들과 놀아줄 시간이 많아 너무나 행복하다는 걸 강조하며. 그녀에게 아들 채지안(5)은 특별한 존재다.
어느 부모에게나 자식은 소중하지만 그녀에겐 남다른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최율미가 결혼한 지 6개월째 그녀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뜻밖의 사고였기 때문에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냉장고를 열면서, 설거지를 하면서, 엄마의 체취가 느껴질 때마다 견딜 수 없어 멍하니 서있곤 했어요. 정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죠. 그때 선택한 것이 아이를 갖는 일이었어요. 내가 견딜 수 없어 살길을 구한 거죠. 그리고 얻은 아이가 지안이에요.”
올해로 결혼 6년차 주부지만 최율미는 아직도 자신이 초보 아줌마라고 말했다. 그런데 좀 더 듣고 보니, 이는 아직까지 신혼이라는 것 강조하기 위한 말 같은 걸?! 메릴린치증권의 상무로 재직중인 남편 채현종씨와 요즘도 손을 잡고 다닌다며 은근히 자랑이다. 이상하게 남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며 말이다.
이제부터는 ‘아나운서’라는 호칭을 빼고 ‘최율미씨’라고 불리길 원한다는 그녀는 끝으로 한마디 툭 던진다. “이건 정말 최율미 아니면 못하는 것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