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 - 2
일본 도쿄대로부터 환수돼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 중인 오대산사고본 중 <선조실록>과 <중종실록>. 배경 이미지는 <중종실록>. 사진제공=규장각
조선시대 왕은 죽을 때까지 자신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없었다. 사초(史草)는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사관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실을 제대로 기록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필화 사건, 즉 사화(史禍)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래서 사관이 사초를 본 뒤 누설하면 중죄로 다스렸다. 조선의 역대 임금과 위정자(爲政者)들은 <실록>에 담긴 ‘춘추(春秋)의 정신’만은 끝까지 지켰다. 심지어 광기의 폭군 연산군(燕山君)도 <실록>만은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물론 예외가 있다. 실록에 수정을 가했던 사례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이 거기에 해당된다. 왕이 아닌 서인과 노론 등 쟁쟁한 당파세력이 했다. 당쟁기에는 집권당의 사관이 자기 당파에 유리하게 편파적으로 실록을 편찬하여 공정성을 잃기도 했다. 또 훗날 집권당이 바뀌면 수정하여 편찬하기도 했다. 이 경우에도 감히 실록 전권을 파기하진 못했다. 실제로 1972년 서울대 도서관에서 <조선왕조실록>의 낙장 500여 장을 발견했는데, 기록의 서너 장, 혹은 50여 장씩 일정 부분을 인위적으로 누락시켰을 뿐이었다(1972년 7월 1일 <동아일보>).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다. 조선왕조 제1대 태조부터 제25대 철종까지 472년 동안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실록>에 임금과 왕가의 이야기만 담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문화 종교 풍속 법률 등 일상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기록했다. 방대하면서도 정확성과 객관성이 매우 뛰어난 기록 유산으로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조선왕조실록>은 대대로 편찬한 것을 축적했다. 왕조는 <실록>을 처음에 <고려실록>을 보관했던 충주사고에 보관했다. 그런데 화재와 전쟁 등으로 소실될 위험에 처하자 <실록>을 인쇄, 출판했다. 모두 5부의 <실록>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1부는 왕조가 참고하려고 옛날처럼 서울의 춘추관에 두었다. 다른 4부는 전쟁으로 인한 재난을 피할 수 있도록 깊은 산속이나 섬에 보관했다. 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고 각각 1부씩 나누어 보관했다.
이렇게 안전 조치를 했는데도 <실록>은 수난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에 정족산·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구황궁(舊皇宮) 장서각에 이관되었다. 이후 1930년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규장각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으로 돌아왔고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오대산사고본(五臺山史庫本) <실록>의 운명은 더 가혹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께 조선총독부 총독 명의로 기증되어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에 소장됐다. 이후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불이 나면서 대부분이 소실됐다. 화를 면한 오대산사고본 중 27책이 1932년에 다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1973. 12. 31 국보 지정).
오대산사고본 가운데 47책은 2006년에 문화재 제자리찾기운동본부 혜문스님이 추가 환수했다. 역시 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다(2007. 2. 26 국보 추가지정). 환수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1998년 정부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의 반환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1998년 11월 2일 <경향신문>). 그러던 중 아주 우연한 기회에 혜문스님은 오대산사고본이 도쿄대(동경제국대학)에 소장되어 있음을 알게 됐다. 혜문스님은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려고 여러 학자들과 관계기관에 질의하며 조사에 착수했다. <실록>이 원래 보관되어 있던 월정사에서 유출된 경위도 조사했다.
결정적인 기록은 도쿄대 교수 시라토리(白鳥庫吉)의 기록이었다. 그는 <사학잡지(史學雜誌, 1914년 도쿄대 역사학과 출간)>에 <실록>이 도쿄대로 옮겨진 경위를 적었다. 일본 도쿄대가 기록한 문서이기 때문에 도쿄대는 <실록>의 약탈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재 제자리찾기운동본부 측은 <조선왕조실록>의 귀환을 65년 한일협정 이후 우리 품으로 돌아온 최초의 국보급 문화재의 귀환이자, 약탈된 문화재 환수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획기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한다. 이들이 찾고자 했던 것은 ‘종이와 먹’으로 쓰인 <실록>이 아니었다. ‘빼앗긴 민족의 자존심’과 ‘<실록>에 기록된 역사의 정신’을 되찾아 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왕조실록 (교과서에 나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2011.5.10, 시공주니어) [네이버 지식백과] [문화재를 찾아서] “전하, 이 글은 볼 수 없사옵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012.4.9, 휴머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