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땐 한푼도 못줘!” 이런 건 쓰나마나
호주에서 결혼을 앞둔 A 씨(27)는 ‘혼전계약서’라는 생경한 단어 앞에서 당황했다. 남자친구가 들이민 계약 조항에는 “부부의 모든 재산은 공동 명의로 한다” “이혼의 책임이 있는 사람은 재산 분할 시 20%만 가져간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A 씨의 사례처럼 영미권 국가에서 혼전계약서는 예비부부라면 한 번쯤 고려해볼 정도로 흔하다. 우리나라 정서상 혼전계약서는 아직 생경한 게 사실. 지금까지 공증을 받은 혼전계약서 작성 건수는 2012년 17건, 2013년 29건, 2014년 28건으로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황혼재혼’이 크게 늘면서 혼전계약서에 대한 관심은 날로 커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재혼 건수에서 50대 이상 남녀가 차지하는 비중은 43%에 달한다. 황혼재혼의 가장 큰 걸림돌은 자녀들의 반대다. 사망이나 이혼에 따른 재산분할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혼전계약서는 재혼을 반대하는 자녀들 앞에서 꺼내들 수 있는 ‘묘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묘책은 현재로선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민법 제829조는 ‘부부재산계약’이라는 이름으로 혼전계약서를 명시하고 있지만, 법원에서 실제로 인정받은 사례는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없었다. 이는 대부분의 혼전계약서가 ‘이혼 시 재산분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민법에선 부부재산계약의 유효기간을 ‘결혼 중’으로 한정하고 있다. 재산분할은 이혼 후에 하기 때문에 공증을 받았더라도 내용 그대로 이행되긴 어렵다.
법원에서 인정받지도 못하는 혼전계약서를 수백만 원을 들여가며 작성할 이유가 있을까. 법무법인 감사합니다의 송명호 변호사는 “‘밑져야 본전’이니 작성해두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재혼 비율 증가, 간통죄 위헌 판결 등으로 혼전계약서 필요성은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때문에 법원의 태도도 바뀔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결혼 전 서로의 재산과 채무 상태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또한 혼전계약서 내용이 그대로 이행되지는 못하더라도, 간접적 증거로서 유리하게 작용할 여지는 있다. 결혼 전 형성 재산을 인정받을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혼으로 재산분할을 할 경우 명의에 관계없이 부부의 모든 재산을 합산해 재산분할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혼전계약서에는 각자의 재산목록을 명시하기 때문에, 이혼 시 개인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수월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혼전계약서를 작성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점은 뭘까. 이에 대해 송 변호사는 “악의적이거나 노골적인 내용은 써도 소용이 없다”고 조언했다. 혼전계약서의 탈을 쓴 ‘노예계약’은 결혼의 본래 목적에 반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내의 재산이 월등하게 많다고 할지라도 “모든 수입은 아내가 관리하고, 남편은 경제활동 시 아내의 허락을 맡는다”는 등의 악의적 내용은 법원이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 이혼전문 변호사에게 상담을 받으러 갔던 B 씨는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다. B 씨는 “예비 며느리가 돈을 보고 시집오려고 하는 것 같다. 이혼하게 되면 십 원도 주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문의했다. 변호사는 B 씨에게 “완전히 재산분할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다. 이런 내용은 작성한다 할지라도 법원에서 인정받지도 못한다”고 답했다. 드라마에서 보듯 돈 없는 며느리에게 ‘갑질’을 할 용도로는 혼전계약서를 작성할 수 없는 것이다.
최대한 자세히 작성하는 것도 혼전계약서를 잘 쓰는 포인트다. 예를 들어 “혼인 중 사전 동의 없이 빚을 졌다면 배우자는 그 부담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이라면, 채무의 규모는 어디까지인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생활채무도 포함되는지, 동의를 서면으로 할지 구두로 할지 등도 정해야 한다. 송 변호사는 “같은 내용도 어떤 문장으로 작성했는지에 따라서도 인정 여부가 갈릴 수 있는 게 부부재산계약이다”고 말했다.
또 혼전계약서를 작성하게 된 경위, 이유에 대해서도 부부가 충분히 상의해 계약서 상 명시하는 게 좋다. 계약서가 반드시 필요했던 정황을 설득적으로 작성한다면 인정받을 가능성 역시 커진다. 어느 한쪽의 필요로 쓴 것이 아니라는 내용도 분명히 적어둬야 한다. 또한 계약서 작성 시 동등한 지위를 담보하기 위해 두 사람 모두 가사법 전문 변호사의 상담을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법원에서는 부부가 평등한 관계에서, 양쪽의 이해관계를 충분히 반영했는지도 고려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재혼부부라면 상속분에 대해 자세히 적어두는 것도 고려해봄직하다. 향후 법적 공방이 벌어질 때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배우자가 상당한 재산을 두고 사망했다면 자녀들과 남은 배우자 간에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상속은 법정 상속분에 따라 33~50% 사이에서 이뤄지지만, 만약 남은 배우자나 자녀가 법정 상속분에 못 미치는 유산을 받았다면 혼전계약서를 증거로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법정 상속분에 못 미치는 유산을 받았을 때, 과도한 증여를 받은 사람에게 자신의 몫을 돌려달라고 소송하는 것)을 진행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민법이나 헌법을 거스르는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야 한다. 아무리 잘 작성된 혼전계약서라 하더라도 법에 위반된다면 효력은 생길 수 없다. 부부평등은 헌법이 지키고 있는 기본적 원칙이다. 때문에 이를 어긴 계약은 인정될 수 없다. 지난 1월 14일 서울 가정법원은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성한 혼전계약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놨다. 부부는 “이혼할 때 재산분할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혼전계약서를 작성했다. 법원은 “이혼 전에 재산분할청구권을 미리 포기하는 것은 인정받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놨다.
일부 전문가들은 혼전계약서를 전반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 추세에 대해 “법원이 태도를 바꿔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랑을 기초로 하는 혼인의 본질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이 사회변화에 발맞추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혼전계약서가 부부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심리적 제어장치가 될 수 있고, 이혼 시 극단적인 공방으로 치닫지 않게 막아주는 순기능을 한다는 점도 인정될 필요가 있다. 송 변호사는 “혼전계약서의 효력에 대해 법원이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줄 때라고 생각한다”며 변화를 촉구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실례로 본 혼전계약서 ‘남편이 바람 피우면…’ 무효! 작성하기도, 인정받기도 어려운 혼전계약서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작성했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부부재산계약은 2001년 인천남동등기소에서 이뤄졌다. 내용을 살펴보면 “혼인 중 취득한 재산의 등기는 아내의 명의로 한다” “혼인 중 중요재산의 수익, 처분 및 관리에 대해서는 아내의 사전동의를 얻어야 하고, 그렇지 아니하는 경우 남편은 아내에게 손해배상의 책임을 진다” “남편의 외도 발각 시 아내는 이혼을 요구할 수 있으며, 남편은 이를 받아들인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이 계약의 경우 아내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법원에서 인정받을 가능성이 적다. 또한 아내가 바람을 피울 가능성도 있는데도, 남편의 외도에 관한 내용만 가정하고 있는 점도 문제가 될 소지가 높다. 2002년 7월에 등기를 마친 계약서의 경우 황혼재혼 부부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각자의 재산과 채무를 확실히 나눠 서로 섞이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에는 “혼인 전 소유하고 있는 재산에 대해서는 각자의 재산으로 하고,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다. 각자의 부채 역시 각자 책임진다”고 적었다. 재산관계에서만큼은 확실히 선을 긋고 싶은 커플에게 유용한 조항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내용이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는 ‘부부별산제’를 택하고 있기에, 개인 명의의 재산과 부채는 개인이 책임지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혼인기간에 따라 재산의 변동이 생기고, 또 그에 따라 어느 한쪽의 명의라 할지라도 배우자의 기여분이 생기기 때문에 이렇게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2005년 안양등기소에서 등기를 마친 계약서의 경우 양육비에 관한 조항을 엄하게 두고 있다. “이혼 사유 제공자는 자녀가 30세가 될 때까지 수입의 50%를 양육비로 지급한다. 수입의 범위는 연금, 보험 등을 모두 포함한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의 경우 일단 이혼 후의 부부재산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에 유효성 자체를 법원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또한 민법상 양육비는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로 규정하고 있기에, 양육비 지급 기간을 30세까지 늘린 점도 무리한 내용이다. [서] |
해외스타들 혼전계약서 이모저모 “부부관계는 월 5회만” 결국 쨍그랑 혼전계약서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된 것도 할리우드 스타들의 소식을 통해서다. 천문학적 수익을 벌어들이는 세계적 스타들에게 결혼은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스타들 중에는 특이한 내용의 계약을 작성한 이들도 눈에 띈다. 2002년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파혼한 제니퍼 로페즈와 벤 애플렉 커플은 부부관계의 횟수까지 계약서에 정한 바 있다. 둘은 “부부관계는 최소 주 4회는 할 것” “고의로 거짓말을 했을 땐 한 번에 100만 달러를 지급한다” “베드신을 찍을 땐 배우자가 입회해야 한다”는 등의 다소 황당한 조항을 넣었다. 왼쪽부터 제니퍼 로페즈, 벤 애플렉.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혼전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아 큰 손해를 봤던 케이스다. 급작스레 제이슨 알렉산더와 결혼을 발표했지만, 55시간 만에 결혼을 취소하면서 2억 원 상당의 포르셰와 위자료까지 물어줘야 했다. 이런 ‘뼈아픈 경험’으로 2004년 만난 케빈 페더라인과는 확실한 혼전계약서를 작성했다. 케빈 페더라인은 브리트니의 재산에 어떤 권한도 없다는 내용의 계약서였다. 결혼 2년 만에 파경을 맞았지만 혼전 계약서 덕에 브리트니는 어떤 재산상 손해도 입지 않게 됐다. 브리트니와 달리 마이클 조던은 오히려 혼전계약서가 발목을 잡은 사례다. 2007년 이혼한 마이클 조던은 결혼생활 중 몸값이 크게 오르면서 위자료도 함께 뛰었다. 1989년 결혼 당시 아내에게 “이혼 시 재산의 3분의 1을 준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이 계약으로 아내 주아니타 조던은 이혼과 함께 1842억 원의 위자료를 받아 챙겼다. 황당한 혼전계약서 작성 사례는 일본에도 있다. 황당 혼전계약서로 화제가 됐던 사와지리 에리카와 다카시로 쓰요시 부부의 결혼식 당시 모습. 그들은 2013년 위자료 없이 협의 이혼했다.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는 22세 연상의 사진작가 다카시로 쓰요시와 2009년 결혼했다. 두 사람은 혼전계약서에 “부부관계는 월 5회만 한다. 그 이상 원할 시엔 에리카에게 1회당 50만 엔을 지급한다”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한 사실을 들켰을 땐 1000만 엔을 준다” “이혼 시 남편 재산의 90%를 아내에게 준다”는 등의 내용을 적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계약서 내용과 달리 2013년 위자료 없이 협의 이혼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