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따라 ‘그때그때 달라요’
[일요신문]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담당했던 ‘부림사건’을 다룬 천만관객 영화 <변호인>에서도 이적표현물 적용과 관련한 논란을 다루고 있다. 극중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와 차동영 경감(곽도원 분)이 부림사건의 공판 과정에서 증거물을 두고 기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다. 당시 차 경감이 채택한 이적표현물은 세계적인 역사학자이자 영국의 외교관이었던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내외문제연구소’에서 이적성의 감정을 거친 증거로 묘사된다. 해당 연구소는 당시 치안본부(현 결찰청) 산하 기관으로 ‘공안문제연구소’를 거쳐 지난 2005년 경찰대학의 치안연구소로 통합됐다. 현재는 학부생들의 교양 필독서로 여겨지는 명저가 당시엔 ‘이적표현물’이었다.
영화 <변호인>에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불온서적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현재는 ‘명저’지만, 과거엔 이적표현물로 규정됐던 도서가 수두룩하다. 역시 세계적인 수정주의 학자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 역시 비슷한 수모를 겪었다.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던 해당 도서는 ‘남침유도설’을 중심으로 한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만 해도 이적표현물로 다뤄졌다. 수정주의에 대한 논란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현재 <한국전쟁의 기원>은 우리 근현대사를 다른 시각으로 설명한 역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밖에도 칼 마르크스의 수많은 저서를 비롯해, 혁명가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 저널리스트 장 코르미에의 <체게바라 평전>, 이찬행 작가의 <힘찬 우리 역사>, 백산서당에서 출판한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 등이 과거 이적표현물이라는 오명을 벗은 바 있다.
설찬영 변호사는 “과거엔 <자본론>도 이적표현물이었다. 동구권 몰락 이후 공산계열 이론 서적이 이적표현물에서 벗어난 것이 불과 10년 전”이라면서 “이적성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거친다. 어찌 보면 또 다른 감정의 영역인 ‘음란서적’과도 비슷한 양상인 셈이다. 이 때문에 과거 이적물로 인정돼 유죄를 받은 판례가 있어도 시간이 흘러 앞서의 판례를 벗어나 무죄로 인정되는 경우도 꽤 있다”고 밝혔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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