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시대도 아니고…흑백 구분 제대로 하자
경찰이 미국 대사를 공격한 김기종 씨의 국가보안법 혐의를 조사하고 있는 가운데 이적물 증거 감정에 대한 객관성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은 지난 6일 김기종 씨가 영장 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국가보안법 적용과 관련해 김 씨의 행적과 더불어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김 씨의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다. 국가보안법 제7조 5항에 따르면 이적표현물이란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을 돕기 위한 문서나 도화를 말하며, 이를 제작, 수입, 복사, 소지, 운반, 반포, 판매 또는 취득하는 경우 처벌을 받게 된다.
현재 경찰은 김 씨의 자택에서 압수한 인쇄물 30점 가운데 19점을 이적표현물로 규정짓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이는 ‘외부의 7개 기관 소속 북한학 석·박사학위를 소지한 전문가들’에 압수한 인쇄물을 의뢰해 감정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다만 경찰은 그 이상의 답변을 거부하고 있다. 사건의 핵심이 될 수 있는 증거물, 즉 경찰이 주장하고 있는 이적표현물의 감정 과정에 대해선 공개를 꺼리고 있는 상황이다.
합동수사본부 공안 담당 경찰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압수물 감정은 복수의 전문기관에 의뢰했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 있다”며 “압수물의 구체적인 목록과 이를 감정한 기관 및 전문가들에 대해선 절대로 공개할 수 없다. 의뢰를 받은 전문가들은 본인의 생각과 전문지식에 비춰 감정에 나섰지만, 이는 일부 논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경찰 관계자는 또한 “이와 관련해 이전에도 외부에 밝힌 적이 없다”면서 “다만 의뢰의 과정은 무작위에 가깝다. 공평성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고, 복수의 기관에 의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증거로서 이적표현물의 감정 과정은 완벽하게 베일에 싸여 있는 셈이다. 공안수사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수사기관의 증거물로서 객관성과 투명성에 문제가 지적될 수밖에 없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통일위원장을 맡고 있는 설창일 변호사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보탰다.
“다른 분야에서도 외부 감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 의료과실 사건의 경우 의사협회 등 외부 전문기관에 의뢰해 신체감정이란 것을 한다. 건물 하자와 관련해선 건축사들에게 의뢰하기도 한다. 당연히 그 감정은 공개적으로 한다. 하지만 이적표현물의 감정 같은 경우는 아예 이러한 감정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기관’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 과정도 비공개다. 재판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공론화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일요신문>은 국내 북한학계를 대표하는 ‘북한연구학회’에 문의했다. 경찰은 앞서 김 씨의 이적표현물을 감정한 집단을 두고 북한학 석·박사 소지자로 밝힌 바 있기 때문. 하지만 학회 측은 “우리는 수사기관으로부터 이적표현물과 관련해 그 어떤 의뢰를 받은 적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만 <일요신문>과 통화한 학회 소속 북한학자는 단서를 하나 덧붙였다.
다수의 공안 사건을 수임했던 설창일 변호사 역시 “수사기관으로부터 증거 감정을 의뢰받는 대다수 인사들은 경찰, 국정원 등 정부의 내부 기관 혹은 자문 학자들이 대다수 배당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사실상 수사기관은 기소가 목적이고, 이를 의뢰받은 전문가들도 관계가 밀접하기에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이 때문에 수사기관이 의뢰한 증거물의 80~90%가 이적표현물로 나온다”고 지적했다. 경찰 관계자가 말한 ‘객관성 확보를 위한 복수의 무작위 기관 의뢰’ 자체에 의문과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이적표현물 감정 과정에서의 ‘기준점’도 모호하다. 이는 국가보안법의 특수성과 더불어 사회과학으로서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다. 앞서의 북한학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학회에서 수능 문제에 대한 오답 여부를 두고 감정을 의뢰받는 경우가 있다. 이는 ‘팩트(사실)냐 아니냐’의 문제이기에 논란의 소지가 거의 없다. 이적표현물 감정은 전혀 다르다. 솔직히 말해, 우리 학자들은 그 내용과 의미를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이다. 그 내용의 이적성은 법에 어떻게 저촉되는지의 문제라 절대로 우리와 같은 일반 학자들이 다룰 수 없는 부분이다.”
이적표현물과 관련해 김 씨의 과거 신분도 수사기관이 넘어야 할 문제다.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소지에 대한 처벌을 하기 위해선 소지의 동기는 물론 외부와의 관련사항, 당시의 정황 등 모든 사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기종 씨는 앞서 경찰이 이적표현물로 규정짓고 있는 증거물에 대해 “본인은 북한을 연구하기 위한 학자”라며 나름의 이유를 대고 있다.
실제 김 씨는 숭실대학교 통일정책대학원에서 ‘남한사회 통일문화운동’이란 논문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97년부터 약 11년간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혐의를 입증해야 하는 수사기관의 입장에서 이러한 그의 경력은 하나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설창일 변호사는 “똑같은 표현물이라도 학자와 같이 연구의 목적으로 다루면 죄가 될 수 없다”며 “김 씨의 경우, 과거 11년간의 강의 경력을 어느 정도로 인정받을 것인가가 문제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앞서의 경찰 관계자는 “현재까지 이적성 문건으로 판단된 것은 총 19건이지만, 아직 회신이 안 온 것도 있다”며 이적표현 증거물이 추가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김기종 씨의 국가보안법 유죄 여부는 법원에서 결정된다. 수사기관의 증거물을 법원이 어느 정도 인정할지, 혹은 재판부가 직접 증거물에 대해 추가적인 감정에 나설지는 좀 더 지켜볼 대목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