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놀라기는 이르다. 눈 앞에서는 어느 무지막지한 게이가 여자를 ‘항문으로’ 강간하고 있다. 끔찍한 고통의 신음 소리가 흘러나온다. 마를린 먼로 이후 ‘20세기가 낳은 마지막 섹스 심벌’이라고까지 불리는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 그녀가 주연한 <돌이킬 수 없는>은 이래저래 지난해 칸 영화제가 낳은 최대의 논란거리였다.
서울 장충동 남산 국립극장 한쪽에는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영등위)가 자리하고 있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도 이곳에서 심의를 받았다. 그런데 이 건물 2층에는 아주 특별한 방이 있다. 겉보기에는 그저 흡연실에 불과하지만 매주 세 차례씩 열리는 영화등급심의가 끝나는 날 이 방은 심의위원들의 ‘피난처’가 되곤 한다.
영화 한 편이 끝날 때마다 상당수 심의위원들이 몰려들어 피곤한 얼굴로 말없이 담배만 피워대기 일쑤다. 방금 본 장면의 흥분과 충격, 그리고 ‘짜증’을 덜어내기 위해서다. <돌이킬 수 없는>을 본 심의위원들이 이곳을 ‘너구리굴’로 만들었음은 물으나 마나. 때로는 이 담배 연기가 상영불가와 장면 삭제라는 ‘불상사’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난 2002년은 이런 저런 이유로 등급심의에 얽힌 곡절이 유난히 많은 해였다. 일흔 살 할머니, 할아버지의 실제 정사 장면을 담은 <죽어도 좋아>의 경우 할아버지의 성기를 할머니가 입으로 애무하는 장면이 영등위 시사실에 걸렸고, 결국 두 차례나 제한상영가를 받는 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이지상 감독의 <둘 하나 섹스>도 마찬가지. 서정과 김중기의 정사장면이 하루 종일 이어져 결국 일반 개봉을 위해서는 3년이라는 기나긴 인내가 필요했다. 그러나 <둘 하나 섹스> 제작진은 수년간의 노력 끝에 ‘무삭제’로 일반 극장에서 개봉하는 데 성공했다.
등급심의 문제에 연루되는 영화가 이런 식의 ‘성적인 금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대런 에로노브스키 감독의 <레퀴엠>의 경우 극단적으로 마약에 탐닉하는 일단의 사람을 소재로 삼았는데 결국 수입추천심의를 받지 못해 국내 개봉이 한때 좌절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표현의 수위’를 상업적인 용도로 이용하는 에로물의 경우에는 장면 삭제 등을 ‘불상사’라고 하기에는 뭐하다. 한 달에 출시되는 비디오용 에로물만 많게는 70여 편에 이른다.
<여자친구 과외하기> <오빠 아퍼> <꽉 조여> <태극기를 꽂으며> 따위의, 제목부터 낯뜨거운 비디오 에로물들은 종종 지능적으로 심의를 피해갈 수 있도록 ‘설계’돼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등급보류’ 판정을 받는 비디오 에로물은 매달 50여 편에 이른다. 하지만 에로물의 심의에는 명확한 기준이나 잣대조차 세우기 힘든 게 현실이다. 과거 등급심의를 맡았던 한 영화인은 “비교적 명확한 의도와 기준에 의해 등급이 정해지는 필름 영상물과 달리 비디오물이나 성인용 게임, 오락물은 뚜렷한 잣대가 없어 심의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라며 “명색이 심의위원이 섹스 장면 수를 세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분명한 사실은, 사회적으로 등급 문제를 공론화시키며 ‘물의’를 빚곤 하는 영화들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얌전한’ 영화라는 점이다. 대개 이 영화들이 진정으로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 게다가 영등위도 삭제요구를 자제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정상적인’ 영상물에서 편집을 당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수년 전 <둘 하나 섹스>, <거짓말> 등을 심의했던 한 등급심의위원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밥도 안먹고 섹스만 하는 것은 천박한 에로물보다도 더 심한 풍기문란에 해당된다.”
심의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어찌보면 ‘표현의 강도’가 아니라 ‘표현의 의도’였다는 얘기. 등급심의제 자체가 가지는 ‘권위주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표현을 제한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사고를 제한하는 것.
하지만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의 수입심의를 맡았던 한 등급위원은 당시 “현기증이 날 만큼 어지럽고 파격적인 장면의 연속이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수입추천을 내주기로 결정했다”고 중얼거렸다. 손에서는 여전히 담배를 내려놓지 못한 채였다. 신기주 FILM2.0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