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박근혜 대선자금 정조준”
성 전 회장 검찰출두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성 전 회장 움직임이 다급해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성 전 회장은 청와대 고위 관계자, 전·현 친박 핵심 의원, 친박계 원로 인사 등 여권 실세들에게 집중적으로 자신의 구명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친분이 있던 언론계 간부들에게도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한 친박 전직 의원은 “7일 오전 성 전 회장과 통화를 했다. 2012년 대선 때 박 대통령 당선을 위해 지원 유세까지 했던 자신이 왜 ‘MB맨’으로 낙인 찍혀 1호 표적이 됐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특히 검찰이 회사는 물론 부인과 아들에 대해서까지 샅샅이 훑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어서 ‘알아보겠다’는 말만 하고 끊었다. 같은 날 저녁에 한 차례 더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성 전 회장 자살 소식을 듣고 조금 미안했다”고 털어놨다.
한 친박 중진 의원 측 역시 성 전 회장과의 통화 사실을 시인했다. 그는 성 전 회장이 마지막까지 매달렸던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다. 해당 의원 최측근 인사는 “검찰 수사 착수 이후 성 전 회장으로부터 여러 번 전화가 왔다고 한다. 검찰 쪽에서 무리한 수사를 하고 있다고 호소해 의원님이 곤란해 했다. 이번 수사가 정권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의원님도 모를 리 없지 않느냐. 그래서 일단 변호인과 잘 상의해 수사를 잘 받으라는 수준에서 조언해 줬더니 성 전 회장이 상당히 섭섭해 했다. 그리고 여의도로 직접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성 전 회장이 박 대통령의 2007년 경선과 2012년 대선 자금 얘기를 꺼냈다고 들었다. 그래서 의원님이 ‘그런 소리 절대 하지 마라’며 다독였고, 다음부턴 성 전 회장 전화를 피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시신에서 김기춘(위)·허태열 전 비서실장 등 현 정권 실세들의 이름이 거론된 ‘성완종 메모’가 발견됨에 따라 향후 검찰 수사 방향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성 전 회장이 지난 2007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때 박근혜 캠프에 관여했던 것은 어느 정도 ‘팩트’에 가깝다. 성 전 회장을 데리고 온 허태열 전 비서실장은 당시 캠프에서 직능총괄본부장을 맡고 있었다. 성 전 회장은 캠프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07년 경선 과정에서 성 전 회장으로부터 몇 차례 ‘용돈’을 받아썼다는 친박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캠프 자금 운영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중진급 의원들이 알아서 ‘갹출’하거나 조달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도움을 많이 받았고, 성 전 회장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나뿐 아니라 성 전 회장을 만났던 친박계 인사들은 제법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성 전 회장은 2012년 대선 때도 박 대통령을 도운 것으로 전해지는데 기자회견에서 굳이 2007년 경선만 언급한 것을 두고 정치권에선 계산된 행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성 전 회장이 2007년 캠프에 불법적인 돈을 제공했더라도 정치자금법상 공소시효(7년)는 지났다. 성 전 회장이 수위 조절을 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이는 여권 핵심부를 향한 성 전 회장의 최후통첩이기도 했다.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갈 경우 아직 공소시효가 살아 있는 2012년 대선 자금까지 꺼내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 전 회장 폭탄 발언 이후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던 청와대 내에 불쾌 기류가 역력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피의자가 대통령을 향해 공공연히 협박하고 있는 것 아니냐. 전혀 대응할 가치를 못 느꼈다”고 설명했다.
결국 성 전 회장은 4월 9일 자살을 택했다. 성 전 회장은 8일 기자회견을 마친 뒤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머물며 9일로 예정된 영장실질심사를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터라 갑작스러운 죽음은 충격을 줬다. 8일 저녁 성 전 회장과 20여 분간 통화했다는 한 후배 사업가는 “기자회견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성 전 회장이 기자회견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나서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무섭다고까지 했다. 가족과 회사를 지키기 힘들 것 같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재판 준비 잘 하라고 하자 ‘내가 그럴 사람 아닌 거 잘 알지 않느냐. 진실을 밝힐 것’이라며 큰 목소리로 말했지만 전화 끊을 때는 다시 모든 게 끝난 것 같다며 자포자기 투로 말했다. 평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일이 터져 너무 슬프다”고 전했다.
박준호 전 경남기업 상무가 지난 10일 성 전 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충남 서산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성 전 회장의 유품으로 발견된 메모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원 안은 박 전 상무가 공개한 성 전 회장의 유품 리스트.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 전 회장에 대한 수사는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돼 사실상 종결됐지만 그 파장은 정치권으로 옮겨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성 전 회장이 9일 아침 <경향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친박 핵심 허태열·김기춘 전 비서실장에게 돈을 건넸다고 ‘유언’과도 다름없는 폭로를 해 파문이 일고 있는 것이다. 성 전 회장은 “2006년 김 전 실장이 박근혜 대통령을 모시고 독일 갈 때 10만 달러를, 2007년 경선 때 허태열 전 실장에게 7억 원을 내가 직접 현금으로 줬다”면서 “기업 하는 사람은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면 무시할 수 없어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전 실장과 허 전 실장은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검찰은 성 전 회장 시신 바지 주머니에서 8명의 정치인과 그들에게 준 돈의 액수가 적혀 있는 메모를 발견했다고 밝혀 큰 파문이 일고 있다. 여기엔 김기춘·허태열 전 비서실장,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유정복 인천시장, 홍준표 경남지사, 부산시장, 이병기 실장, 이완구 총리 실명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홍 지사 정도를 제외하곤 모두 친박계 핵심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이다. 또 몇몇 이름 옆에는 성 전 회장이 건넨 돈의 액수가 기록돼 있었다. 이들은 하나 같이 메모에 적혀 있는 내용에 대해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11년 성 전 회장으로부터 1억 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홍준표 지사의 측근은 “내가 틀리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고 밝혀 돈 받은 사실을 인정했다. 이는 성 전 회장 메모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편, 검찰은 성 전 회장이 남긴 메모의 필적 감정을 마무리한 뒤 정식 수사에 나설 예정이다. 성 전 회장이 사망했고, 여권 핵심 인사들이 연루돼 수사 착수가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지만 벌써부터 특검이 거론되고 있는 등 의혹 해소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높은 상황에서 검찰로서는 이를 모른 체 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조차 강력한 수사를 촉구했을 정도다. 지난 10일 김진태 검찰총장은 “메모지의 작성경위 등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을 확인하고 관련 법리도 철저히 검토해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현재 오르내리고 있는 인사들 대부분이 친박 핵심으로 꼽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박근혜 정권 도덕성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검찰 수사 이대로 좋은가 10년간 수사 도중 자살 83명 성완종 전 회장 자살 다음 날인 4월 10일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검찰의 수사 관행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검찰이 수사 진행 과정에서 피의사실을 공표해 인격적으로 모욕을 가하는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이는 지난 2009년 5월 검찰 수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저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장면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수사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표적 사례는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꼽힌다. 정 회장은 현대그룹 비자금 의혹으로 중수부 수사를 받고 있던 2003년 8월 종로구 계동 사옥에서 투신해 충격을 줬다. 이듬해인 2004년 3월엔 노무현 전 대통령 형에게 금품을 전달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던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이 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2005년 11월에는 국가정보원 도청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던 이수일 전 국정원 2차장이 목을 매 숨졌다. 현 정부 들어서도 비슷한 사건은 끊임없이 발생했다. ‘철피아’ 비리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던 김광재 전 한국철도시설공단 이사장이 지난해 7월 숨졌고, 방위사업 비리에 연루돼 수사를 받던 예비역 해군 소장 함 아무개 씨도 지난 1월 한강에 몸을 던졌다. 이에 대해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예전엔 피의자에게 수치감을 주는 것도 수사 기법으로 통했던 때가 있었다. 별건 수사도 빈번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부작용이 계속되고 있고, 과학 수사가 강조되고 있는 만큼 검찰 스스로 개선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