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이쯤이면 고질병
대우조선해양과 STX조선해양의 대주주인 한국산업은행(산은)의 사장 선임 논란과 관련해 조선업계 고위임원이 불만을 터뜨리며 던진 말이다. 임원이 언급한 누가 점지해 준다는 것인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바로 정부, 청와대를 향한 것이다. 청와대가 정부 산하 단체장의 인선에 직접 관여한다는 말은 기정사실이었고 조선업계도 이번에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언제까지 이런 악습이 이어져 내려가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리는 목소리도 분출하고 있다.
대주주인 산업은행의 사장 선임 관련 조선업체들의 불만이 거세다. 작은 사진들은 왼쪽부터 고재호 대우조선해양 사장, 정성립 대우조선해양 사장 후보자(현 STX조선해양 사장), 이병모 STX조선해양 사장 후보자(현 대한조선 사장).
2015년 초 조선업계의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산은이 대주주로 있는 대우조선해양 사장 인선이었다. 결과는 STX조선해양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던 정성립 사장의 9년 만에 친정 복귀. 산은은 정 사장의 이동으로 느닷없이 공석이 된 STX조선해양 대표이사 자리에는 역시 산은이 최대주주로 회생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대한조선의 이병모 사장을 추천했다. 산은의 관리 하에 있는 조선업체 대표이사들이 자리만 이동한 것이다.
농담거리로만 여겼던 ‘사장 돌려막기’가 현실화되자, 해당업체들은 물론 언론들조차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산은은 대한조선과 관련해 법원과 채권단의 관리를 받고 있는 만큼 후임 사장은 누가 될지 모른다고 하지만, 채권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기관이 산은이라는 점을 보면 그들의 변명은 당장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발뺌일 뿐이다. 대우조선해양 사장 인선 과정에서 거론됐던 인사들 중 한 명이 내정되는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 왜 꼬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인사 파문은 정부가 확실한 의중을 산은에게 전달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누구도 공론화를 하지 않았지만 대우조선해양 사장 인선은 사실상 정부, 그 가운데에서도 권력의 최정점인 청와대가 낙점한 인사가 올 것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예정대로라면 고재호 사장의 임기가 끝나는 2월 말 이전까지 후임 사장이 추대됐어야 했다.
그런데 1월부터 진행된 청와대의 정부부처 개각인사가 암초에 걸리면서 어긋나 버렸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채권단 사이에서 대우조선해양 후임 사장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정한 사람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데 김 비서실장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없었던 일이 되면서 문제가 꼬였다. 국무총리 등 장관 인사 문제까지 겹치면서 대우조선해양 문제는 뒷전이 돼버렸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내 사람 챙길 여유가 없지 않겠느냐. 산은측은 그때부터 크게 당황해 했다”고 지난 과정을 설명했다.
산은은 그래도 이번 대우조선해양 사장 인선을 최대한 적법한 절차에 맞춰 진행하려고 했다. 2년 전 벌어졌던 STX조선해양 사장 선임 사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2013년 STX그룹 주역 계열사들이 잇따라 채권단과 기업재무구조개선(워크아웃)을 신청하며 사실상 그룹이 해체된 뒤, 산은을 비롯한 채권단은 강덕수 회장 등 기존 경영진의 강제퇴진이라는 무리수를 감행하며 STX조선해양의 후임 사장에 박동혁 대우조선해양 부사장을 추천했다. 박 부사장 자신도 불과 며칠 전에야 내정 소식을 ‘통보’ 받은 것은 물론, 그가 속해 있던 대우조선해양에 사전 양해도 거치지 않았던 전격 인사였다.
인사의 후폭풍은 매우 컸다. STX그룹과 STX조선해양 노동조합은 물론 협력업체들도 당시 인사에 대해 대대적으로 반발했고, 대우조선해양 내부 및 노조도 산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연이어 쏟아냈다. 결국 박 부사장은 STX조선해양 이사회에서 사장 후보로 추천된 뒤 23일 만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금융자본이 산업을 좌지우지했을 때 벌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연출했다는 비난은 그해 출범한 박근혜 정부가 편향된 기업관을 보이고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확산됐다. 예상을 뛰어넘는 비난에 당황한 산은은 하루라도 빨리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유정형 당시 STX조선해양 부사장을 대표이사에 앉힌 뒤 현역에서 물러났던 정 사장을 복귀시켰다.
당시 사장 선임과정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한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정부가 부실기업에 대한 강한 구조개편을 진행하려고 했고, 이에 산은이 STX그룹 정리를 성공사례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은데, 의욕이 너무 앞서 누구에게도 공감을 얻지 못했다. 산은 내부에서도 2년 전 상황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반성의 목소리가 나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 ‘간보기식’ 정보 유출, 고재호 사장 연임론까지
2015년으로 돌아오자. 산은은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대우조선해양 사장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부, 청와대에서 인사를 낙점해주지 않으니 포장을 잘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됐다.
대우조선해양 사장 선임을 싸고 간보기식 정보 유출 이뤄지기도 했다. 사진은 대우조선이 건조한 1만4천TEU급 컨테이너선.
산은은 또 다시 중심을 잃고 헤맸고, 이 와중에 고질병이 재발됐다.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산은의 실무 담당자들이 일부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일부 후보 인사 이름을 흘려버리는 ‘간보기’가 벌어진 것이다. 다수의 산은 고위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검증되지 않은 언론 보도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라는 확답이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고 사장 연임론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역시 산은발이었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대우조선해양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충수를 둔 산은은 3월 16일 사장 선임의 마지막 시한이었던 이사회에서 후임 사장을 추천하지 못한 채 고 사장의 대표 직무대행 체제라는 꼼수를 제시했다. 현 대표이사가 대표이사 직무대행으로 바뀌는 초유의 사태. 과연 회사가 제대로 운영될 것인지 물음표가 끊임없이 제기됐다.
고 사장이 3월 31일 정기 주주총회 직후 임직원들에게 보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정리한 담화문을 통해 작심발언을 했다. 고 사장은 담화문에서 “우리 임직원들이 단연 회사의 제1 주인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주인이 주인다운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을 때, 종국에는 다른 사람들이 대신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고 강조했다. 겉으로는 대우조선해양의 주인은 대우조선해양 구성원이 돼야 한다는 뜻이지만, 외부에서는 속내는 회사를 흔들고 있는 산은에 대한 고 사장의 불만의 표시라고 해석하고 있다.
# 대안이 없어…‘사장 돌려막기’로 사태 무마
고 사장의 발언이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당초 5월말까지 대표이사 직무대행체제로 가려고 했던 산은은 5일 후인 4월 6일, 정 사장을 후임 사장으로 추대한다고 발표했다. 더 이상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못하면 산은 책임론만 불거질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정 사장 카드는 산은의 능력 한계를 스스로 보여준 꼴이 돼버렸다. 정 사장은 2년 전 STX조선해양 사장 선임 사태 때 구원투수로 올라온 사람이다. 당시에도 믿을 만한 인물이 없어 그를 급히 데려왔는데, 이번에도 또 다시 대안이 없어 그를 지목한 것이다. 더군다나 STX조선해양 후임 사장에는 이 사장을 이동시켰다. 산은 내에서 조선사 최고경영자(CEO) 인력풀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산은의 한 관계자는 개인적인 견해라는 단서를 달고 “우린들 무슨 힘이 있겠느냐. 윗분들이 정해주지 않는데”라며 하소연했다. 그의 말대로 산은만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정경분리를 외치지만 기업을 바라보는 청와대와 정부의 시각은 그저 내 사람을 앉히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번 인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결국 모든 피해는 당사자인 기업들이 감내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외면하고 있다.
조정우 언론인
산은, 대우 출신 사장 선호 왜? 15년간 식민지…통하는 게 있다고? 한국 조선산업은 물량 면에서 있어 세계 1위 위상을 중국에 내줬지만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빅3를 중심으로 생산관리와 첨단기술력 면에서는 여전히 경쟁 국가들을 압도하고 있다. 이번에 대우조선해양 신임 사장으로 선임된 정성립 사장과 STX조선해양 사장으로 추천된 이병모 사장을 비롯해 산은 지붕 아래는 아니지만 성동조선해양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한 하성용 전 사장(현 한국항공우주산업 대표)과 김연신 전 사장이 모두 대우 출신이다. 공석 상태인 대한조선 대표이사도 대우 출신 인사가 내정될 것으로 유력시되고 있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출신 스타 전문경영인들이 많은데도 산은을 비롯한 채권단이 대우 출신 사장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우조선해양은 그룹 해체 직후 2000년 10월 대우중공업으로부터 회사 분할에 의해 신설 법인으로 설립된 후 15년째 대주주인 산은 지배에 놓여 있다. 오랜 기간 동안 회사를 관리하다보니 산은은 대우조선해양 구성원에 대한 능력과 성향을 확실하게 파악했다. 이를 통해 ‘산은의 코드’에 맞는 인사를 추려낼 수 있었다. 조선산업은 영업과 생산, 조달, 금융, 노무 등이 조화를 이뤄야 성공할 수 있는 산업이며, 회생절차에 돌입한 조선사들의 경우 금융 부문의 중요성이 특히 강조된다. 산은은 관리하고 있는 3개 조선업체들의 금융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데, 당연히 생산과 영업에 우선순위를 두는 현장 인력들과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장 장악력을 갖추면서 금융 면에서도 이해력이 뛰어나 산은과 의견조율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인사를 CEO에 앉히려고 한다. 이런 면에서 채권단 관리체제에서도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 대우조선해양 출신 인사들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대우조선해양이 보유하고 있는 위기경영 노하우도 큰 장점이다. 대우그룹은 다양한 인수·합병(M&A)을 통해 피인수 기업의 이질적인 기업 문화를 대우화시켜 성장시켜왔다. 더군다나 그룹 해체라는 큰 위기를 겪으면서 부활에 성공한 경험도 갖고 있다. STX조선해양이나 대한조선에도 대우 출신 인사를 내정한 이유도 현대중공업이나 삼성중공업은 부족한 이러한 노하우가 풍부하기 때문에 해당기업 조직의 반감을 줄이고 단기간에 정상화할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는 것이 산은측의 설명이다. 하지만 과연 산은이 이들 인사들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줄지가 관건이다. 어느 업종을 막론하고 회생절차에 돌입한 기업을 정상화시키는 작업은, 특히 조선사들을 회생절차 이전의 수준으로 부활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현재까지 해운사들의 상선 발주가 계속 줄어들어 선가는 하락하면서 조선소들이 난립해 업체 간 출혈경쟁이 지속되면서 회사를 살리는데 소요되는 기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의 위탁경영을 받은 대한조선도 2011년부터 이 사장 체제에서 정상화를 진행중이지만 지난해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가 개시된 점을 놓고 봐도 정상화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영여건이 최악인 상태이지만 산은을 비롯한 채권단은 당장 눈앞에 볼 수 있는 ‘성과’를 강조한다. 기대에 못 미치니 채권단으로부터 선임됐던 전문경영인들이 1~2년 만에 옷을 벗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우 출신 CEO들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산은이 인내심을 보여주지 못할 경우 이들도 단 기간에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