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이 쓴 말 ‘오늘도 업무지시를 못 받았다’
앞서 <일요신문>은 지난 2013년 2월 ‘박지만의 ‘EG테크’ 노조원과 전쟁 단독추적’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양 씨의 사연을 전한 바 있다. 당시 양 씨는 기자에게 자신의 일기장 사본을 건넸다. 다시 들춰본 고인의 일기장에는 회사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고통이 구체적으로 실려 있었다.
지난 1998년 EG테크에 입사한 양 씨는 포스코 광양제철소에서 산화철 폐기물 포장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2006년부터 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 조합원으로 활동했고, 그 뒤부터 회사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수 차례 보직이 변경됐고, 징계를 받기 시작했다. 금속노조를 탈퇴하라는 사측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EG테크 노동자 양우권 씨가 <일요신문>에 건넨 일기장 사본.
2011년 해고되기 직전까지 그가 일기장에 가장 많이 적은 말은 “회사로부터 어떠한 업무도 지시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오늘도 아무런 업무지시를 받지 못하고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 이외에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있었다. -2010년 12월 30일”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직원들이 나하고 대화하기를 꺼리는 것 같다. -2011년 1월 3일”
“오늘도 마찬가지로 어떠한 업무지시도 받지 못하고 하루종일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조원이란 것이 그렇게 기업이 볼 때 큰 죄를 지은 것인가? (중략) 진정 법은 가진 자들을 위해 있는 것인가? 정말 가슴이 너무 답답하다. 요즘은 머리가 너무 무겁고, 밤엔 잠조차 제대로 이룰 수가 없다. 괴롭다. -2011년 1월 6일”
“15:40분경 A 노무팀장 왔었다. B 분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억에 합의하고 퇴사하는 거로. 내가 일하고 싶으니까 제발 현장으로 돌려보내 주라고 하니 그렇게 해주면 (노동조합)조끼 벗을 거냐고 하길래 어차피 현장근무 하면 조끼가 더렵혀지니 당연히 벗어야 되지 않겠냐고 하니 조끼와 함께 다른 것도(조합 탈퇴) 벗을 수 있냐고 하였다. -2011년 1월 7일”
“오늘은 오랜만에 작업 오더를 받았다. 배수로 청소 일을 했다. C 씨와 함께했다. 비록 궂은일이었지만 오랜만에 현장에서 일을 하니 시간도 잘 가고 기분도 괜찮았다. -2011년 1월 21일”
회사에서 궂은일을 시키는 것조차 기뻐했던 양 씨는 2011년 1월 26일, 회사를 무단이탈했다는 이유로 2개월 정직 처분을 받고, 결국 이를 계기로 해고된다. 다음은 그 날의 일기다.
“오늘도 9:40분경에 D 부장이 왔다. 2층으로 또 내려갔다. 오늘도 처음에는 안전교육을 하는 체하다가 다시 회유하려는 이야기를 해서 어제 잠을 못자서 머리가 너무 아프고 피곤해서 집중이 안 되니 그만하자고 했다. 3층 사무실로 올라와서 A 노무팀장에게 아프다고 하니 그럼 조퇴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E 과장에게 조퇴를 좀 해달라고 하니 근퇴계를 올리라고 해서 조퇴원을 전자결재로 올렸다. 얼마 후 조퇴원을 올렸으니 결재를 해달라고 하니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결재를 해 줄 수가 없다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D 부장 이야기를 들으니 어제 축구를 본다고 잠을 못자서 피곤해 했다고 해서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어제도 그제도 D 부장에게 분명히 이야기했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3시간 이상 그것도 깊은 잠을 이룰 수 없고 회사에 오면 너무 아프고 피곤하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나는 축구를 봤다고 했지 축구를 본다고 잠을 못 잤다는 이야기는 한 적이 없다. 14시경 조퇴가 안 된다고 하길래 타고 나올 차도 없고 먼 거리를 걸어 나올 수도 없어서 119를 불러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도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건강이 위험해진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EG테크 측은 양 씨가 무단결근했다는 이유로 2011년 2월 9일 그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회사 측은 징계위원회가 열리기 전날 양 씨에게 다시 한 번 조합 탈퇴를 위한 회유에 나서기도 했다.
“오늘도 운전실에서 운전 매뉴얼 학습했다. 13:30분경 F 노협 근로자 대표가 나에게 전화를 해왔다. 퇴근 후에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G 근로자위원과 같이 퇴근해서 회사 기숙사 앞에서 H 대표와 만났다. H 대표가 A 노무팀장이 광영동 XX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만나보자고해서 같이 갔다. 옻닭을 시켜서 먹으면서 A 팀장이 노조를 탈퇴하면 ①노조활동 하면서 부당하게 받지 못한 임금 ②원하는 부서로의 현장 복직 보장 ③ 아내가 받지 못한 퇴직금 ④탈퇴 후 어떠한 보복성 불이익 없이 신분보장 등을 제시하면서 탈퇴서를 써줄 것을 종용하길래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2011년 2월 8일”
다음날 양 씨는 정직 2개월 처분을 받았고, 정직 기간 중 제대로 출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 조치됐다. 그 뒤 양 씨는 회사를 상대로 해고무효소송을 벌였고, 4년간의 법적 투쟁을 벌인 끝에 승소해 지난해 5월 복직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현장이 아닌 4년 전과 같은 사무실 대기 명령이었다.
회사에 복귀한 뒤 그는 틈틈이 노조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고, 자살 하루 전날에는 회사 체육대회 현장에서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는 박지만 회장 앞으로 남긴 유서를 통해 “당신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될, 기업가로서의 최소한의 갖추어야 할 기본조차 없는 사람”이라며 “내가 하늘에서 두 눈 부릅뜨고 내려다볼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EG테크는 왜 그토록 양 씨를 회사로부터 배척해야만 했을까. 민주노총 전국금속노조 등으로 구성된 ‘고 양우권 노동열사 투쟁대책위원회’는 지난 11일 포스코 광양제철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러한 노조 탄압의 배후에는 무노조, 노조말살 정책이 있다”며 관련 대기업을 그 배후로 지목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