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갈이’ 예고에 ‘따로 뭉치자’ 목소리
새정치연합 지도부에서는 내년 총선과 내후년 대선을 앞두고 ‘호남 물갈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당 의원총회에서 발언을 하는 문재인 대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 체제 후 호남권은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 사실이다. 친노 진영을 비롯한 당 지도부는 내년 총선과 내후년 대선을 앞두고 ‘호남 물갈이’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아 왔다. 문 대표의 전략 단위에서는 구체적인 수치와 일부 대상까지 명시했다. 4선급 중진 의원들은 물론, 당내 주요 당직을 맡은 그 아래 선수의 의원들도 용퇴 또는 수도권 차출 대상이라는 내용이다. 같은 맥락에서 호남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박지원 전 원내대표(3선)도 수도권 차출 대상이라는 설이 나온다. 이는 DJ 3남 김홍걸 씨의 호남 지역구 출마설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여의도에서는 이중 일부 인사들의 실명이 포함된 ‘살생부’ 리스트가 돌아다니기도 한다. 천정배 의원에게 패배한 후 호남권 쇄신이 절실한 터라, 호남권 의원들도 공천을 통한 일부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데 상당수 동의하는 모습이다. 일부 의원들은 ‘공천 칼바람’에 맞기 전에 먼저 수도권 등 다른 지역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괜히 버티다가 당선이 어려운 ‘격전지’로 떠밀려 나가느니 먼저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선점하는 것이 차선책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호남 3선 의원의 보좌관은 “가능성 차원에서 다른 지역을 검토해보긴 했는데 경쟁력 있는 지역은 이미 다들 선점돼서 마땅한 곳이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4·29 재보선이 참패로 끝나기 전, 문 대표의 한 핵심 참모는 “호남에서부터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야 총선 승리와 대선 승리가 가능하다. 상당한 비율로 교체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재보선 패배 후 광주 민심이 격변하면서 구체적 논의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당 쇄신을 책임질 혁신기구가 출범하면 조만간 문제가 다시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새정치연합 핵심관계자는 “혁신기구가 최고위와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볼지가 중요하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초선도 가릴 것 없이 다들 교체 대상에 오를 판”이라고 내다봤다. 호남에서 심상찮은 기류가 감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천 혁신’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한다면 호남권 균열이 더 가속화될 수 있다. 당 핵심 관계자는 “호남은 대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호남 의원들의 위기의식이 커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혁신기구다. 문재인 대표 등 지도부가 최고위 권한의 거의 전권을 넘겨 대신 공천개혁을 이루도록 칼을 넘겨주고 당내 계파들이 이에 동의할 경우 호남권이 특별히 반발할 대상을 찾기 어려워진다. 당 위기 극복을 위해 전권을 넘겨받은 혁신기구가 ‘대수술’에 나선다는 것은 당내 모든 의원들의 암묵적 동의를 전제로 한 것이라 명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혁신위원장 유력 후보였던 조국 서울대 교수가 강력한 반대를 받았던 것은 사전에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강력한 ‘칼바람’을 드러내놓고 예고했던 영향도 컸다고 한다. 그렇다고 다른 인물이 된다고 해서 호남권의 위기감이 줄어들 것 같지도 않다. 당 지도부 관계자는 “누가 되든 비슷한 방향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각 의원들은 활로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기 시작했다. 광주 3선 A 의원의 경우, 친노계 B 의원과 만나 당 안팎의 일에서 친노에 협조하는 대신 일정 부분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다만 도와주기로 한 일이 서로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서 지금은 다시 등을 돌린 상태다. 일부 의원들은 친노계와 문재인 대표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면서 ‘호남 대 친노’ 구도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호남 신당론’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천정배 의원은 4·29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후 ‘뉴DJ 플랜’을 통해 다음 총선에서 세력화를 이루겠다고 밝혔다. ‘세력화’의 의미에 대해서는 신당 창당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선언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정가에서는 천 의원이 호남 세력들에게 시그널을 주고 있다는 해석이다. 당장 신당 창당 구상을 밝힐 경우 아직 공천 가능성이 남아 있는 현역 의원들이 천 의원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데 부담을 느낄 수 있어 일단은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 의원은 5·18 기념행사를 앞둔 17일 문 대표와 독대하는 등 새정치연합과의 관계도 유지하고 있다. 광주 출신 한 당직자는 “현역 의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총선을 앞두고 공천 가능성이 높지 않은 쪽은 천 의원 쪽으로 몰려 세력화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악의 경우 호남을 중심으로 한 신당이 정말 탄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른바 ‘호남 자민련’ 설이다. 충청권을 기반으로 탄생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자유민주연합에서 이름을 따 빗댄 것이다. 시대에 뒤처진 ‘지역 정당’ 추진론이라는 점에서 부정적 시각이 더해져 있지만, 친노에 대한 반감과 함께 중앙정치에서 오랫동안 소외돼 왔다는 지역 민심을 고려하면 반드시 불가능하지만도 않다는 시각도 있다.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전남 순천·곡성에서 깃발을 꽂는 등 새정치연합 일색이었던 정치권 개편 조짐도 보이고 있어 유력 인사들을 중심으로 뭉치면 ‘해볼 만하다’는 인식도 확산돼 있다.
해법은 다르지만 새정치연합 내에서 느끼는 ‘호남 위기론’은 분명한 실체가 됐다. ‘물갈이론’이냐, ‘호남 회귀론’이냐의 해법 차이가 있을 뿐이다. 광주에서 만난 한 광주시당 당직자는 “우리가 지금껏 민주당(새정치연합)의 중심이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면서도 “이제는 호남을 대표할 만한 정치인도 없고 중앙에서 소외된 지도 굉장히 오래됐다. 들러리만 서주는 비참함이 커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안수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