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변호인이 가해자 편에…‘어떻게 이럴 수가’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법률조력인 제도가 변호사들의 불성실한 태도로 유명무실화 되고 있다. 사진은 변호사 사무실이 밀집해 있는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앞 거리.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그 취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최근 피해자와의 법률상담을 기피하거나 재판 출석조차 하지 않는 법률조력인들이 적지 않아 피해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심지어 성범죄자 측 변호인으로 둔갑해 재판에 출석하는 해괴망측한 일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슬기(가명) 사건’은 법률조력인 제도의 총체적 난국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난 21일, 슬기 엄마는 <일요신문>과 만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가슴을 쳤다. 2011년, 의붓 외할아버지는 슬기(당시 8살)에게 몹쓸 짓을 시작했다. 엄마와 외할머니가 시장을 보러 간 사이, 슬기의 외할아버지는 ‘짐승’으로 돌변했다. “할아버지, 나 거기가 아파요”라고 호소해도 외할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2년 동안 시달리다가 2013년 9월, 슬기는 용기를 내서 아빠에게 외할아버지의 만행을 털어놓았다. 경찰 조사가 시작됐지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니가 돈을 벌려고 성추행 당했다고 한 거지?”라며 슬기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다.
슬기 엄마가 범죄사실을 신고했던 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관계자는 “일주일 안으로 법률조력인의 연락이 갈 거다”며 슬기 가족을 안심시켰다. 이 관계자는 “성범죄 피해아동을 위해 국가가 무료로 변호사를 선임해준다.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국선변호인(법률조력인) 제도”라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였다. 슬기 엄마는 내 편 변호사가 생긴다는 생각에 잠시나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도 변호사의 연락은 전혀 오지 않았다. 슬기 엄마는 너무 답답해 해당 변호사 사무실로 연락했다가 뜻밖의 사실을 접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변호사는 1년 전 가해자 측인 슬기 외할머니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등 가해자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슬기 엄마는 꺼림칙한 기분을 감출 수 없어 A 변호사에 대한 선임을 변경해달라고 요청했다.
악몽 같은 일은 계속됐다. 바뀐 법률조력인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얼굴만 한 번 봤을 뿐이었다. 사무장에게 수소문을 해봐도 짜증스럽고 귀찮다는 듯이 슬기 엄마를 대했다. 더욱 충격적인 일도 벌어졌다. 1심 재판의 가해자, 의붓 외할아버지 측 변호인이 바로 A 씨였던 것. 슬기 엄마는 해당 지역 변호사협회에 항의했지만 “절차상 하자가 없어 정당하다”라는 답변만 받았다. 슬기 엄마가 끊임없이 항의를 해 1심 직전에야 A 변호사는 슬기 사건에서 손을 뗐다. 슬기 외할아버지는 대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영화 <도가니> 한 장면.
법무부에 따르면 현재 법률조력인 지원 건수는 2012년 2098건, 2013년 8084건, 2014년 1만 3363건으로,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법무부 여성아동인권과 관계자는 “대상 범위가 확대된 측면도 있지만 법률조력인의 보수를 개선하는 등 제도가 정착하면서 법률조력을 받는 성범죄 피해자가 전보다 늘었다”고 분석했다.
법률조력인은 사건 종결 뒤 수행실적에 따라 적게는 20만 원, 많게는 200만 원까지 받는다. 상담일지, 변호인 의견서, 수사 참여 등이 보수 산정의 기준이 된다. 개선됐다지만 수임료가 비현실적이라는 비판도 거세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법률조력인 수임료가 너무 적다. 20만~30만 원 받아내자고 서류 써내는데 20~30분 걸리는 일이 생긴다. 그래가지고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아동·청소년을 위한 법률조력인 제도는 여전히 유명무실하다. 법률조력인에 대한 사후 관리감독이 이루어지지 않아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2차 피해를 주기도 한다. 법률조력인들은 법률 상담을 등한시하고 심지어 자신이 법률조력인으로 선정됐다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앞서의 A 변호사도 <일요신문>과의 통화해서 “법률조력인으로 선정됐다고 달랑 팩스 2장을 받았다. 팩스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그 사실을 20일이 지나서야 알았다”며 “슬기 엄마가 법률조력인 선임을 취소하고 외할머니가 나를 찾아 외할아버지 사건을 의뢰할 때도 슬기 사건인지 알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그는 “지역 내 변호사 3명이 순서대로 검사로부터 법률조력인으로 지정을 받기 때문에 나타난 문제”라고 보탰다.
그러나 A 변호사의 행위는 ‘변호사의 위임사무가 종료된 후에도 동일사건의 당사자로부터 사건을 수임할 수 없도록 규정된 변호사윤리장전 제18조 제2항’에 저촉될 가능성이 있다. 피해 아동의 법률조력인을 했던 변호사가 가해자 측 변호를 맡는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이라는 뜻이다.
슬기 사건뿐만이 아니다. 2011년 당시 전직 고등학교 교장인 의붓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영희(가명·당시 10세) 역시 법률조력인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영희 엄마는 “1심에서 집행유예가 나왔다. 법률조력인이 더 신경을 썼더라면 실형이 나왔을 거다”며 “1년 가까이 진행된 재판에서 법률조력인은 공판 과정에서 얼굴을 비치기는커녕 상담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영희 사건 2심 법률조력인인 B 변호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B 변호사는 영희 엄마에게 “내가 해줄 게 없다. 탄원서만 그냥 써라”는 말만 늘어놓았다. 결국 의붓아버지는 2심에서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영희 엄마는 “변호사님 그 말 한마디 들으러 광주까지 갔다”며 “내 딸은 지난해 말에 자살 시도까지 했다. 중환자실에서 3일 만에 깨어났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나주 성폭행 사건’의 은진(가명·당시 7세)의 법률조력인도 B 변호사였다. 2012년 8월, 고종석은 은진이를 성폭행하고 목을 졸라 살해하려고 했다. 범행의 잔혹함으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지만 은진이 엄마 조 아무개 씨(40)는 오히려 고종석보다 법률조력인의 행태에 더 분노했다. 조 씨는 “B 변호사를 두 번밖에 못 만났다.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B 변호사사무실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나주 어머님은 처음에 한 번 뵀고 그 뒤엔 안 오셔서 상담을 못했다”며 “영희 사건은 2심 법률조력인이었다. 공판에 참여 안 해도 되는 걸로 알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아청법 제18조의6에 따르면, 아동·청소년대상 성범죄의 법률조력인은 수사기관에의 출석권, 증거보전절차 청구권 및 참여권 등 수많은 권리들을 가진다. 1심이든 2심이든 은진이를 위한 권리를 성실히 행사하지 않은 셈이다.
아동·성폭력 피해자 자조모임 ‘느티나무’ 관계자는 “법률조력인이 재판 일정을 앞두고 해외여행을 가버린 일도 있었다. 돈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변호사가 많다”며 “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을 만나봤지만 법률조력인의 문제가 없다는 사건은 단 1건도 없었다. 차라리 그 예산과 지원을 피해자에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