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부터 등장 인물까지 ‘닮긴 닮았네’
<국제시장>이 ‘기획창작아카데미’ 수강생 졸업작품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작은 사진은 수강생의 <차붐> 제작 기획서.
지난 2009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차세대 영화 기획 인재 등을 양성하기 위해 ‘기획창작 아카데미’를 개설했다. 이 곳 수강생들은 약 9개월간 각 부문 전문가들로부터 수업을 듣고 그해 12월 졸업작품을 제출했다. 수강생 중 한 명인 김 아무개 씨(43)는 영화 기획서 <차붐-차범근과 파독 광부 이야기>을 졸업작품으로 발표하고 이를 제출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올 초, 김 씨는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자신의 졸업작품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 영화 투자·배급사인 CJ E&M과 제작사인 JK필름을 상대로 저작권 분쟁에 돌입했다. 김 씨는 이미 지난 2009년 5월과 9월 각각 <차붐> 기획서와 시나리오를 한국저작권위원회에 저작권등록을 해 놓은 상태였다. 당시 아카데미 졸업 작품집에 실린 김 씨의 기획서를 살펴보면 비단 ‘파독 광부’라는 주요 소재 이외에도 실제 <국제시장>과 유사한 지점이 적잖이 발견된다.
김 씨의 기획서에는 시나리오 주요인물 부분에서 “차붐을 주축으로, 파독 광부, 간호사가 주인공의 3톱 역할을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또 영화의 화자에 대한 1안으로 “파독 광부의 시점으로 영화를 전개해 파독 광부, 간호사 등 동포들이 ‘영웅’임을 강조한다”고 써 있다. <국제시장>도 비슷한 맥락을 보인다.
기획서는 “역량 있는 감독과 함께 팀 작업으로, 시나리오를 정제해(refine) 웰메이드(well-made) 영화로 제작한다”며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임순례 감독,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 <국가대표>의 김용화 감독을 후보로 올려놨다. 잘 알려졌듯 <국제시장>은 윤제균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김 씨는 기획서에서 등장인물의 경우에도 파독 광부 ‘이돌수’ 역에 영화배우 오달수 씨를 캐스팅했는데 <국제시장>에서도 오달수 씨는 파독 광부 ‘달구’를 연기했다.
김 씨의 기획서는 <국제시장>처럼 ‘열심히 산 아버지 세대에 감사’라는 주제의식과 <포레스트 검프>처럼 당시 역사적 인물을 반영하는 등의 차별화 요소들도 제시하고 있다. 당시 시대상을 그리는 영화이니만큼 김 씨의 기획서도 <국제시장>처럼 기업인으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등장시키고 있다. 김 씨 기획서에는 ‘三星電子(삼성전자)’라는 옛 한자로고, 국민가수 ‘나훈아’, 유니폼을 입은 꼬마아이 ‘박지성’, 예술가 ‘백남준’, 코미디언 ‘이주일’이 등장하는데 <국제시장>의 ‘現代建設(현대건설)’, ‘남진’, ‘이만기’, ‘앙드레 김’, ‘서영춘’과 흡사하다.
영상 부분에 있어서 김 씨의 기획서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상륙 작전처럼 극사실적 영상미를 구현하자고 제안했는데, <국제시장>에서는 한국전쟁 1·4 후퇴의 흥남부두 철수 장면을 공들여 생생하게 담아냈다.
자신의 저작권이 침해됐다고 판단한 김 씨는 콘텐츠 거래 또는 이용에 관한 분쟁을 조정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인 콘텐츠분쟁조정위원회에 CJ E&M과 <국제시장> 제작사인 JK필름을 피신청인으로 하는 조정신청을 냈고, 위원회는 지난 4월 24일 이 사건에 대해 2명의 변호사로 조정위원을 구성하고 조정회의를 개최했다. 김 씨는 조정회의에서 위에 언급된 내용 등을 중심으로 자신의 기획서와 <국제시장>의 유사성을 피력했다.
자신의 기획서가 유출된 배경에 대해서 김 씨는 “2009년 기획창작 아카데미 강사 중 3명의 CJ E&M 경영진이 있었다”는 점과 “2009년 CJ 홈페이지의 ‘영화 제안 접수’ 이메일로 기획서 <차붐>을 제안했다”는 점을 제시했다. 김 씨의 지적대로 현재 CJ E&M에서 각각 공연사업 부문 대표와 음악사업 부문 대표를 맡고 있는 김 아무개 씨와 안 아무개 씨는 당시 아카데미 강사로 참여했다.
4월에 열린 조정회의는 CJ E&M과 JK필름 측에 신청인에 대한 보상안을 검토해 통보해 달라고 권고했다. 보상안으로 조정회의는 장학금 명목으로 김 씨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것과 신청인인 김 씨가 보유한 다른 영화 기획안의 판권을 구매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하지만 CJ E&M 등은 당시 조정회의의 조정안을 거부해 이 사건은 지난 5월 4일 ‘조정불성립’으로 최종 종결됐다.
조정회의의 조정안은 법적 강제력을 지니는 사안이 아니라 다툼의 당사자들을 화해하게 할 목적의 권고 조정에 불과하다. 콘텐츠조정위원회 관계자는 “우리는 저작권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기관이 아니다. 피신청인들이 신청인의 저작권을 위반했다고 인정한 것도 아니다”며 “다만 신청인과 피신청인 간 저작권 다툼이 있고 신청인이 자신의 피해에 대해 막연하게 금전적 보상을 원하니 그것들을 구체화해 피신청인들에게 전달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CJ E&M과 JK필름 측은 김 씨의 일방적 주장일 뿐 저작권을 위반한 사실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CJ E&M 관계자는 “우리는 영화 투자사이자 유통사로 ‘표절이다, 아니다’에 대해 공식적으로 입장을 내 놓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면서도 “영화가 성공할 경우 김 씨 같은 사례가 종종 있어 왔다”고 말했다.
김 씨는 지난 26일 <일요신문>과 만나 “지난 2007년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제정한 ‘영화 및 음악분야 표절방지 가이드라인’을 보면 저작권 침해 여부 판단에 있어서 ‘일반인의 입장에서 유사성 여부가 판단돼야 한다’고 돼 있고, 대사뿐 아니라 등장인물, 플롯, 전개과정, 분위기, 전개속도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하라고 돼 있다”며 “심지어 CJ가 투자한 미국의 영화제작사 드림웍스는 <슈렉> 제작 당시 슈렉 그림책의 주인공 이름과 그 그림책이 갖는 코믹적 ‘느낌’을 판권으로 구매했다. CJ는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모습을 버리고 국내 원작자도 인정하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최근 변호사를 선임했다. 표절 여부는 법정에서 가려질 공산이 커졌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