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 오겠지” 눈물의 건배
▲ 박중훈. | ||
20년 전쯤의 이야기고,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지 15년쯤 되지만 그 말을 되씹어 보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딱 맞는 말인지 무릎을 치게 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기자생활을 한 후에도 동창을 만나면 한 줄이라도 정성을 들이고 싶은 마음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그만큼 애정을 쏟는다는 이야기다.
단순히 학교의 선후배이기 때문에 무작정으로 그들에 관한 우호적인 기사를 쓰는 것은 아니다. 인터뷰나 취재 섭외를 하며 학교가 같다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도 출신 학교를 이야기하면 섭외를 흔쾌히 받아들이기도 하고 건조한 인터뷰를 하다가도 동문 얘기를 건네면 ‘업 클로즈 앤 퍼스널 인터뷰’가 되기 일쑤다.
사실 대학 동기인 영화배우 박중훈과는 기묘한 인연이다. 서로 학과는 달랐지만 단과대가 같은 그와 나의 동기 중에는 남자로는 변우민이 있고 여자로는 조용원, 김희애, 전인화가 있다. 생각해보면 탤런트 혹은 영화배우였던 여자 동기들과는 친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남자 동기들, 특히 박중훈과는 묘한 인연을 갖고 있다. 아무래도 문무대와 전방훈련(2주간 훈련을 받으면 한 달 반씩 군복무 기간을 삭감해주던 제도)을 함께 받았기에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추억 속에 간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때 성남에 있는 문무대를 갔을 때다. 낙하산 훈련을 위한 이른바 막타워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을 받으며 연기자로서 그의 재능을 발견했다. 그 덕에 당시 조교로부터 심한 얼차려를 받았지만 말이다.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졌다시피 막타워에서 뛰어내리기 전 조교가 “애인 이름을 부르면서 떨어지십시오!”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85년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내 순서 앞에, 앞에 있던 박중훈 차례였다. 다른 사람은 ‘영순이’ ‘삼순이’라고 불렀지만 박중훈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조교는 물론 모든 훈련병들이 배꼽을 잡고 데굴데굴 굴렀으니 말이다. 그의 애인은 다름 아닌 ‘파주댁!’이었다. 한번 상상해 보시라. 철모를 쓰고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박중훈이 ‘파주댁!’이라며 뛰어내리는 장면을 말이다.
학교 시절 박중훈은 연기생활에 바빴고, 필자 역시 나름대로 바쁜 생활을 보냈던 터라 이후 기억이 별로 없다. 그와 다시 조우를 한 곳은 그다지 유쾌한 곳(?)이 아니었다. 90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필자는 전경으로 안양경찰서 정문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반가운 친구(?) 한 명이 나타났다. 바로 박중훈이었다. 미국 유학을 준비중이던 그가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경찰서를 찾은 것이다.
대학교 동창을 알아보지 못한 채 민원실이 어디인지 내게 물었다. 나는 친절하게 설명하고 우리 인연을 이야기했다. 그는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영화 에서 처음으로 경찰서 정문을 지키던 전경에게 하던 말투처럼 내게 이렇게 말했다. “좋은 날이 올 거야. 힘내고…”였다. 사실 그 말을 듣고 눈이 시큰해질 정도였다.
▲ 영화 중 한 장면. 박중훈은 이날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머리박기 연기를 해야만 했다. | ||
한 탈영병이 극중 박중훈의 아내인 최진실을 인질로 삼고 대치를 하다가 박중훈이 대신 인질로 잡혀 고초를 겪는 장면이었다. 건물 옥상 위에는 자갈이 깔려있었는데 그곳에 ‘머리 박아!’를 하는 설정이었다. 영화계에 복귀한 그의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강우석 감독은 NG를 계속 선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박중훈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장면을 설정하고 계속해서 NG를 선언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장면은 취재를 나온 언론사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어쨌든 박중훈은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연기를 계속했고, 나중에는 눈시울을 붉힐 정도였다.
마침내 강우석 감독이 OK 사인을 했고, 점심식사가 이어졌다. 눈이 벌개진 채 기자들과의 식사 자리에 앉았던 박중훈은 식탁에 놓여있던 소주를 마셨다. 가까이 있던 그에게 당신과는 나는 동창이고, ‘파주댁’과 경찰서 정문에서의 조우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힘들겠지만 참아내면 좋은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의 눈은 젖었지만 그는 끝내 눈물방울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기자생활을 하며 그와 10여 차례 술을 마셨는데 매번 그 이야기가 안주거리로 등장했다. 한 번은 그가 정색을 하며 “이제는 그 이야기 하지 말자”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나는 그 앞에서 우리의 ‘소중한 인연’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기사, 그가 출연한 영화에 관한 기사를 쓸 때면 우리들의 일화가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그러면서 “우리 동창, 우리 동창 하는 영화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펜을 들곤 한다. 확실히 국적은 바뀌어도 학적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노컷유스>연예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