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이해찬 총리(맨 오른쪽)에게 인사권까지 맡기는 등 모든 권력을 내려놓았지만 이를 밖으로 알리지 않았다. 사진제공=청와대
노건호 씨의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그의 한마디는 갈등과 내홍에 휩싸였던 새정치연합을 또 다시 분열케 하는 원인이 됐다. 야당이 혼란과 분열을 거듭하는 때 참여정부 청와대 대변인, 제1부속실장, 연설기획비서관 직을 맡으며 ‘노무현의 복심’으로 통했던 윤태영 전 대변인이 책 한 권을 내놨다.
책은 <바보, 산을 옮기다>란 제목으로 정치인 노무현이자 대통령 노무현의 ‘국민통합’을 향한 여정의 도전과 좌절을 엮은 기록이다. 이 책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임기 중 사임을 진지하게 이야기했던 장면도 볼 수 있다. <일요신문>은 지난 1203호에 ‘윤태영 전 대변인 참여정부 비화 공개’ 기사를 통해 책의 내용을 일부 보도했으나 지면의 한계로 다 담지 못한 글을 <일요신문i>를 통해 공개한다.
# 국무총리에 대한 노무현의 생각
<바보, 산을 옮기다>는 윤 전 대변인이 곁에서 지켜본 인간 노무현의 캐릭터를 접할 수 있는 일화들을 담고 있다. 책은 노 전 대통령은 임기 중 가장 큰 목표를 국민 통합과 ‘분권적 대통령제’라고 설명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과거의 ‘제왕적 대통령제’을 탈피해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분권적 대통령제를 위해 국무총리의 제청을 받아 대통령이 국무위원을 임명하는 제도를 이용해 국무총리 지명권을 과반수를 차지하는 정당에 주겠다는 구상을 했다. 구체적으로 과반의 정당이나 정당 연합이 투표로 총리 후보를 정하는 방법도 생각했다. 총선 직전 이 같은 제안은 ‘탄핵 사태’로 인해 없던 일이 된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이 같은 취지를 살리기 위해 ‘총리 중심 국정운영’을 천명하고 국무총리를 국회에서 과반수를 점한 열린우리당 인사 중에서 찾기로 했다. 처음에는 김혁규 전 의원 카드를 꺼냈지만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이해찬 의원으로 선회했다. 책에서는 이해찬 의원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신뢰를 읽을 수 있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노 전 대통령은 “이해찬 총리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준 덕에 외교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칭찬한다. 또 노 전 대통령은 “이제 총리가 물건을 판매하고 경영하는 일에 몰두한다면 대통령인 나는 공장 내의 시스템을 고치는 일에 전념할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과 이해찬 전 총리의 신뢰는 두터웠지만 갈등도 있었다. 갈등은 유시민 전 장관에 대한 입각을 두고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은 유 전 장관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할 것을 지시했지만 이 전 총리는 반대의사를 명확히 했다. 접견실에서 만난 대통령과 총리는 고성이 오가며 감정 섞인 말까지 나왔다. 이 전 총리가 “감정적으로 그러지 마세요”라고 하자 노 전 대통령이 “어째서 총리가 생각하는 것만 옳습니까? 발표 안 하면 내가 직접 기자실에 나갑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총리가 쉽게 물러서지 않자 노 전 대통령은 “그럴 거면 그만두세요!”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총리의 권한이 확실하기 때문에 대통령과도 갈등을 빚는 장면이 나올 수 있었다.
#노무현과 참여정부 인사들
저자가 참여정부 청와대의 제1부속실장이었던 만큼 참여정부 인사와 노 전 대통령과의 장면도 여럿 등장한다. 참여정부에서 비서실장과 민정수석을 역임한 문재인 새정치연합 당대표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2006년 5월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는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과 환담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한 문 대표에게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대신 영남 지역에서 기반을 마련하는데 힘을 보태줄 것을 당부했다.
이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은 “정치를 하기 싫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정치를 그만두기 어려우니 관리를 해주세요. 인연이 그렇게 맺어진 걸 어떡합니까?”라고 말했다. 얼마 뒤 7월이 되자 노 전 대통령은 문 대표를 다시 곁으로 불러들일 생각을 했다. 문 대표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계획은 대통령 비서실 출신 인사가 장관 자리를 모두 차지하는 게 보기에 좋지 않다는 비판에 접게 된다. 지난 2007년 8월 노 전 대통령은 다시 비서실장으로 돌아와 일하는 문 대표를 정무관계수석회의에서 화제에 올리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TV를 보면, 사람들이 각기 인상을 가지고 있어서 화난 인상도 있고 묘한 표정도 나오고 하는데 우리 비서실장은 어째서 그런 안 좋은 표정이 한 번 도 안나올까요” 갑작스런 농담조 질문에 문 대표는 천호선 당시 대변인을 꺼냈다. 문 대표는 “요즘 우리 가운데 얼굴은 천호선 대변인이 단연…”이라며 말끝을 흐리자 노 전 대통령은 “아 그건 당연히 그렇지요. 그런데 후보가 되면 얼굴이 좀 찌그러지게 나오는 것 같아. ‘문재인 후보’는 어떻습니까”라고 받아쳤다. 여기에 정무비서관은 “강남 미용실에서 40대 주부에게 인기투표를 하면 문 실장이 1위랍니다”라고 덧붙이자 이에 노 전 대통령은 “응? 강남에서? 강남스타일이네. 자! 그럼”이라고 미소로 대꾸했다는 일화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문 대표가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계획을 밝힌 것에 대한 아쉬움을 농담으로 에둘러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안희정 충남도지사에게는 정치를 하지 말라고 주문했고, 대선자금 문제로 감옥 생활을 하고 나온 2004년 말에도 똑같은 입장을 전했다. 지난 2006년 4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노 전 대통령은 경선캠프 추린 참모들을 오랜만에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도 노 전 대통령은 강원도지사 출마 문제로 고민하는 이광재 전 의원에게 완곡한 만류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는 고향에 가서 살겠다면서 퇴임 이후 이른바 ‘친노 핵심 인사’들의 훗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퇴임 이후) 자네들이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다. 어떤 명분을 가진 정파로 발전하게 될지, 아니면 옛날 인연으로 돌아가서 그냥 잘 지내는 수준으로 갈지, 그것은 자네들의 선택이 되겠지. 내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밝혔다.
#대연정 제안과 박근혜 대표에 대한 걱정
지난 2005년 노 전 대통령은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바로 ‘대연정’이다. 국회에서 대통령의 힘은 다 빼놓고 무슨 일 있으면 대통령 탓을 한다고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국론통합을 위해서는 다수당이 권력을 잡고 그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회에 권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이 대통령에게만 요구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회도 책임질 사람이 나와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야 책임 소재가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대연정을 위해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회동했지만 박 대통령은 대연정에 대한 거부 의사를 명확히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 대해 회고하면서 “정치라는 것은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결단으로 진보를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만일 박근혜 대표도 집권을 한다면 똑같이 이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 입니다”라고 말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