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주지 않는’ 중앙정부에 묵직한 한방
박원순 서울시장이 4일 오후 시청 브리핑룸에서 메르스 관련 긴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 박 시장은 “서울 강남의 한 의사가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기 직전 재건축조합 총회 참석 등 1500여 명의 시민들과 직·간접 접촉을 했다”고 밝혔다. 사진제공=서울시
“지금부터 서울시 메르스 방역본부장은 박원순입니다.”
박원순 시장이 지난 4일 밤 기자회견을 끝내자마자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박 시장은 전 국민을 연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메르스 사태에 관해 ‘투명한 정보공개’를 약속하고 서울시 자체 격리시설을 마련하겠다고 하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단번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박 시장의 행보에 여론은 일단 반색했다. 그동안 온·오프라인에서는 메르스 확산에 대응하는 정부의 미온적 태도를 놓고 ‘아몰랑(잘 모르겠다는 뜻의 인터넷 용어, 여성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음) 대통령’이라는 비판이 제기됐고, 보건당국 역시 ‘안알랴줌(안 알려준다는 뜻의 인터넷 용어)’ 정책을 고수해 불안감을 키웠다. 질병관리본부 역시 공식 SNS 계정을 폐쇄했다 복구하는 등 ‘불통’ 이미지를 더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 시장의 ‘소통 행보’에 여론은 환영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박 시장의 돌발(?) 행보에 정부여당은 당혹감을 표하며 즉각 견제에 나섰다. 청와대는 서울시 기자회견 다음날(5일) “서울시 발표로 불안감과 혼란이 커지는 그런 상황에 대해 매우 우려스럽다”면서 유감을 표명했고, 보건복지부 역시 서울시 기자회견 내용에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진실공방’을 전개했다.
하지만 말과 행동은 달랐다. 보건당국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이유로 의료기관 비공개 원칙을 고수하던 것에서 최초 감염자가 발생한 B 병원을 ‘평택성모병원’이라고 처음 공개하고 최초감염자가 입원해 있던 기간에 병원을 방문한 이들에 대한 전수조사에 착수하는가 하면, SNS 괴담으로 치부해 오던 공기감염 및 바이러스 변종 가능성까지 폭넓게 조사하는 등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박 시장은 보건당국과 별도로 ‘메르스 방역본부장’을 자처하는 과정에서 ‘정치 9단’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보건복지부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 역시 35번 환자가 5월 30일 참석한 주택조합총회 참석자들의 자가 격리를 위해 해당 조합에 참석자 명단을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합 측이 자료제출을 거부하자 서울시 측에 참석자 명단 확보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평소 재건축 조합과 긴밀히 연결돼 있는 서울시는 보건당국보다 먼저 정보를 취득, 먼저 자가 격리를 요청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해버렸다는 것이다. 조용히 소극적으로 움직였던 보건당국 입장에서는 무척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35번 환자(3차 감염자)는 ‘5월 29일부터 경미한 증상이 시작되었고, 5월 30일 증상이 심화됐다’는 서울시의 발표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면서 “메르스 증상을 처음 인지한 것은 31일이고, 그전까지는 내가 메르스에 걸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반박했다. 35번 환자는 또 “14번 환자(2차 감염자)를 직접 진료한 적이 없다” “질병관리본부에 자가 격리를 요청한 것도 나였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시 역시 “발표는 보건복지부의 자료에 따른 것”이라고 물러서지 않고 있다. 박 시장과 가까운 한 야권 관계자는 “정치인이 정치쇼 하는 것이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그래서 서울시의 발표 가운데 크게 잘못된 내용이 있느냐”면서 “기자회견에서 35번 환자 개인을 책망하는 내용은 없었다. 증상을 미리 알았든 몰랐든 메르스에 감염된 상태에서 밖으로 돌아다녀 또 다른 전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야권 일각에서는 35번 환자의 설명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지에 관해서도 의구심을 표한다. 그가 일하는 강남의 D 병원은, 삼성서울병원으로 의료진이 메르스에 감염됐다는 것을 알고도 보건당국과 함께 은폐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온 곳이다. 35번 환자의 경우 5월 31일에서야 메르스 감염을 의심했다고 밝혔지만, 병원은 이미 5월 29일 응급실에 메르스 환자가 다녀간 사실이 알려져 긴급하게 소독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7일 기준 삼성서울병원에는 메르스 확진자가 17명까지 늘어났다.
앞서의 야권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 소속 공무원까지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박 시장 입장에서 보건당국 지침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데 한계를 느꼈을 수 있다”라고 밝혔다. 보수 성향의 한 정치평론가 역시 “보건당국은 깜깜한 극장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데 관객들이 놀랄까 불을 켜지 않고 수습하려고 한 것이라면, 서울시는 일단 불을 켜고 수습하려 한 것”이라면서 “박 시장이 잘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4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자국에서 메르스 환자가 발생했을 때 신속한 초기 대응으로 환자수를 2명으로 차단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5일, 메르스 발병 17일 만에야 환자들을 음압병상에서 격리 치료중인 국립중앙의료원을 찾았다. 매일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질병관리본부 핫라인은 먹통이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박 시장의 ‘한방’이 먹혀들어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