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스펠드까지 나와 “웰컴” “원더풀”
▲ 7박8일의 미국 방문을 마치고 지난 22일 귀국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박사모 회원들의 환영에 손을 들어 답하고 있다. 박 대표는 미국에서도 유력 차기 주자로 상당한 환대를 받았다. 국회사진기자단 | ||
미국은 박 대표를 한국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톡톡히 접대했다. 미국의 조야 인사들은 박 대표 개인에 대한 호기심뿐 아니라 새로운 한미동맹의 방향, 북핵문제에 대한 해법, 미국관 등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심을 표명했다는 것이 동행한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한미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인 점을 감안하면 이번 방문은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띠었다. 이번 방문에서 박 대표는 미국측으로부터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 대표는 북핵 해법과 관련, 미국과 북한의 양자회담을 촉구하는 등 ‘할 말’을 하면서도 한미동맹을 강조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다.
미국의 박 대표 ‘환대’는 방문 이틀째인 지난 16일 미 국방부 방문 때 연출됐다. 당초 박 대표는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을 면담할 예정이었으나 사전 통보도 없이 도널드 럼스펠드 장관이 직접 박 대표를 영접한 것이다. 미 국방부 장관이 국가원수가 아닌 야당 대표를 영접한 것으로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문턱이 높기로 유명한 미 국방부가 박 대표에게 문호를 개방한 자체가 파격적인 것인데, 장관이 직접 호스트 역할까지 한 것은 최대한 격식을 갖춘 행위라는 것이다.
박 대표를 집무실로 안내한 럼스펠드 장관은 “내가 젊었을 때 포드 전 대통령을 모시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 대표를 만난 적이 있다”며 각별한 ‘인연’을 소개한 뒤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것도 알고 있다”고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이어 “책상 유리 밑에 한국지도를 놓고 항상 보고 있다”면서 평양 외 북한 대부분 지역에 불이 꺼져 있고, 남한은 환하게 밝혀진 한반도의 야간 인공위성 사진을 박 대표에게 선물했다. 당시 동행했던 한나라당 인사들은 “예상밖의 환대에 상당히 놀랐다”고 했다.
미국 언론계 인사들과의 비공개 접촉도 주목을 받았다. 박 대표는 16일 필립 베닛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과 오찬을 한 데 이어 18일에는 폴 스타이거 <월스트리트 저널> 편집국장, 리처드 M 스미스 <뉴스위크> 회장 겸 편집장과 잇달아 조찬과 오찬자리를 가졌다.
전여옥 대변인은 “그들은(미국 언론인) 박 대표의 모든 것에 대해 궁금해 했고, 상당히 공격적인 질문이 많았다”며 “특히 한미동맹에 대한 박 대표의 생각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고 밝혔다. 전 대변인은 “박 대표는 질문에 대답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 했다”면서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라 인사청문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긴장감이 돌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 유력 언론들은 장래가 촉망되는 외국 인사가 방문했을 때, 식사를 겸한 비공식 초청 인터뷰를 하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다. 미래의 고급 취재원을 선점하려는 뜻도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자질을 검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박 대표는 이번 방문에서 잭 크라우치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 짐 리치 미 의회 하원 동아태소위원장, 로버트 졸릭 국무부 부장관, 리사 머코스키 상원 동아태소위원장,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 등 정관계 인사를 두루 만나 의견을 교환했고, 미국기업연구소(AEI) 간담회, 헤리티지재단 연설회, 컬럼비아대학 연설회 등을 통해 북핵 및 한미동맹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미 국무부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박 대표는 한국인의 무비자 입국을 요청했으나 미국측 관계자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비자를 받으려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것에 대해 한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혈맹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이제 무비자 입국을 허용할 때가 됐다”고 거듭 촉구했다.
그러자 미국측 인사는 “참 끈질기시군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박 대표의 황소고집이 빛난 순간이었다.
박 대표의 영어실력은 일상적인 대화가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편이다. 모든 연설도 영어로 직접 했다. 박 대표는 17일 미 보수주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 연설에서 “만약 김정일 위원장을 다시 만난다면 그를 설득하겠다”고 했고, 18일 뉴욕 컬럼비아대학 강연에서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 미국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기회가 된다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가감없이 솔직하게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북핵 해결사 역할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부인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의 만남을 추진했으나 클린턴 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심장 수술을 받는 바람에 무산됐다. 미국 민주당의 차기 대권 후보로 유력한 힐러리 상원의원과의 만남은 미국과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들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박 대표는 “괜한 오해를 받을 수 있었던 자리였는데 차라리 잘됐다”면서도 아쉬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박 대표는 미국측 인사들에게 계영배(戒盈杯)를 선물했다. 흰 도자기로 빚은 계영배는 술이 잔에 8할 이상 차오르면 모두 새어나가도록 만든 것으로, 과음은 물론 과욕을 경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계영배를 선물받은 미국측 인사들은 계영배의 의미를 설명받고는 ‘원더풀’ ‘땡큐’를 연발했다고 한다.
미국 교민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워싱턴과 뉴욕, LA 등 세 곳에서 가진 교민 환영회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박 대표에 앞서 얼마 전 미국을 방문했던 김원기 국회의장 환영회 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곽성문 의원은 “박 대표의 대중성을 미국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유승민 대표비서실장은 “박 대표가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이에 상응하는 대담하고 포괄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고, 그 반대일 때는 단호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한 것은 미국뿐 아니라 한국측 입장과도 다른 독자적인 제안”이라며 “미국이 만족하지는 않았겠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박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각인시켰다”고 이번 방미를 평가했다.
유영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