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지휘로 암울한 조국 현실 알리다
1962년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하는 안익태. 그는 공연 현장에서 단원들의 실수를 지적하는 등 완벽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왼쪽은 한국환상곡 악보.
“음악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뜻을 합치게 함으로써 모두가 한 형제처럼 서로 사랑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이오. 내가 그들 머리 앞에서 군도(軍刀)를 휘둘렀더라면 아무도 노래를 부르려고 하지를 않았을 거요. 그러나 지휘봉을 드니까 두 말 없이 노래를 불렀거든. 그것도 아주 열성과 애정과 성실성을 가지고 말이요.”
1955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공연을 한 직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연주회를 열었던 안익태는 남다른 흥분에 휩싸였다. 동경 연주회에서 그가 ‘한국환상곡’을 지휘하고 일본인 합창단원들이 ‘애국가’를 한국말로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 그 감격은 벅찰 만큼 컸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일제시대의 설움을 ‘음악’을 통해 복수를 했다는 일차원적인 감격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보다 안익태는 음악을 통한 ‘평화와 사랑’에 주목했다. 연주회 이후 부인 롤리타 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익태는 “결국 두 나라는 음악을 통하여 형제국이 된 거요. 이 점이 바로 나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이었소”라고 소감을 밝혔다. 안익태는 민족이 겪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의 비참함과 아픔을 치유하는 데 음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한국과 동경의 연주회를 통해 이를 직접 목격했다.
작곡가 에밀 폰 자우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안익태(왼쪽부터). 아래는 베를린 필하모니와 함께한 안익태.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은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 일제시대, 광복, 한국전쟁, 애국가 등이 마치 한 편의 서사시처럼 펼쳐지는 교향곡이다. 안익태는 세계 여러 악단에서 지휘봉을 들 때마다 한국환상곡 등 자신의 작품을 레퍼토리에 넣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어려운 조국의 현실 앞에서 음악으로나마 조국을 세계에 알리고 싶은 의지가 강했던 셈이다. 안익태는 1934년 4월 18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서양음악에 대하여-음악공부를 희망하는 이에게’라는 글에서 “이상 제 조건(음악가적 소질)을 완비한 학생은 위대한 천재가 있는 사람인즉 고상한 인격과 강한 의지로써 성실히 전진하여 위대한 음악가가 되어 조선을 세계적으로 소개하는 동시에 동포에게 의의 있는 봉사를 하기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질 있는 후배들이 세계적 음악가가 되어 한국을 세계에 알리길 바랐던 셈이다.
음악을 통한 조국애를 강조한 만큼 안익태의 음악관은 ‘깐깐’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거듭 수정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환상곡만 하더라도 작곡 이후 수차례 수정, 보완을 거쳤다. 공연 후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메모한 뒤 그것을 보충하기도 했다. 허영한 교수는 “한국의 상황이 처음 한국환상곡을 작곡했을 당시와 계속 달라졌기 때문에 이를 반영하기 위해 수정을 가했을 것이다. 지휘자이기 때문에 공연을 통해 어느 부분의 작곡이 미진한지 빨리 캐치해 반영했을 것이다. 그만큼 완벽주의적 성격을 가졌다”라고 분석했다.
그의 완벽주의적 성격은 지휘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안익태 그 영광과 슬픔>의 저자인 김경래 씨(경향신문 전 편집국장)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그의 성격에 관한 한 가지 일화를 들려줬다. 김 씨는 “1943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당시 3·1절을 기념해 미국 워싱턴에서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 합창을 지휘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한참 지휘를 하다 ‘하나님이 보우하사’를 들어가는 시점에 지휘봉을 탁 치고 지휘를 멈추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을 들어갈 때 포르티시모 표시가 돼 강하게 불러야 하는데 그게 안됐다는 것이다. 연습 때면 모르겠는데 실제 공연에서도 미흡한 건 참지 못했다. 고집도 그런 고집이 없었다”라고 혀를 내둘렀다.
1962년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 공연 모습.
1962년 서울에서 열린 ‘제1회 국제음악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 국내에서 처음 열린 국제행사이자 엄청난 규모로 각계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이었다. 세계적인 지휘자 안익태의 지휘로 한국환상곡이 연주가 시작될 즈음, 저음부가 몇 마디 실수로 시작을 하자 안익태는 그대로 연주를 중단시켰다. 문제는 그 다음. 안익태가 단원들을 한바탕 혼을 냈던 것이다. 연주는 다시 속개돼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지만 당시 상황은 ‘해프닝’으로 일간지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하지만 안익태의 이런 성격은 공연장 밖을 벗어나진 않았다. 자신이 혼을 낸 단원 집에 찾아가 사과를 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허영한 교수는 “지휘를 할 때는 그 누구보다 무섭지만 막상 공연장을 벗어나면 꼭 그렇진 않았다.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상임 지휘자를 할 때도 혼을 낸 후 나중에 집으로 찾아가서 ‘미안하다. 내가 과했던 것 같다’고 사과를 했다고 한다. 당시 마요르카 오케스트라는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안익태가 지휘를 맡은 이후 그나마 ‘준 프로’로 성장했다. 안익태의 음악적 욕심과 이끄는 힘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렇게 안익태는 완벽주의적 성격을 바탕으로 음악을 통해 한국의 현실과 아름다움을 알리고 궁극적으로는 인류애와 평화를 이루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한국환상곡과 우리의 국가 애국가는 이러한 안익태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역작’이었다. 음악의 힘을 믿은 안익태는 1936년 <신한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힌다. “음악의 위대한 힘이 실로 민족운동과 혁명 사업에 다대한 활기와 도움을 주는 것은 과거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온데, 진실로 바라는바 이 신작 애국가도 우리 민족운동과 애국정신을 도우는 데 다대한 도움이 되기를 성실히 바라는 바입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안익태 명곡 뒷얘기 고국 공연 땐 항상 ‘논개’ 고장 진주 들러 부인 롤리타 안과 안익태.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스러운 음악이라는 뜻인 강천성악은 안익태가 1959년 작곡한 교향시로 전통 아악에 근거해 한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1960년 6월 15일 런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초연한 이 곡을 두고 <런던타임스>는 “안 씨의 교향시는 결코 단순하지는 않다. 만약 그 인상이 좀 더 선명했더라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동양적 냄새를 풍기는 참신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평을 내놓았다. 논개는 짜임새 있는 구성이 특징이다. 안익태는 논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고국으로 돌아와 공연을 할 때도 논개의 고향인 진주에 들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청초하고 아름다운 논개의 모습, 그녀의 애국심을 높게 산 듯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논개는 최근까지도 안익태의 곡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곡으로 꼽히기도 한다. 허영한 교수는 “개인적으로 안익태의 곡 중 짜임새와 완성도 면에서 ‘논개’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평을 했다. 1948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심포니 지휘 후 합창단과 함께한 안익태. 안익태가 만든 곡 중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얽힌 곡들도 상당하다. 대표적인 것이 교향시 ‘마요르카’다. 1948년경에 작곡한 마요르카는 당시 마요르카의 경치에 흠뻑 빠진 안익태가 여러 영감을 통해 완성한 곡이다. 당시 안익태는 마요르카에 ‘성체축제행렬’이 있던 날, 타악대의 행진을 지켜보며 무릎을 딱 쳤다. 타악대가 독특한 리듬으로 행진의 보조를 맞추는 것을 보고 곡 리듬에 힌트를 얻은 것이다. 이 곡은 안익태와 친분이 있던 마요르카의 지인이 영화관을 개관할 때 개관기념 특별 연주회 프로그램으로 초연을 하게 됐다. 안익태가 편곡한 곡 중에 ‘월광’은 1949년에 완성됐는데, 부인 롤리타 안 여사가 병원 신세를 졌던 게 계기가 됐다. 당시 안익태와 롤리타 안 여사는 함께 파리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롤리타 안 여사의 몸 상태가 갑작스럽게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다. 안익태는 병실을 지키면서 평소 부인이 좋아하던 월광’을 편곡하기로 결심한다. 파리의 잿빛 하늘과 당시 안익태의 우울한 마음이 편곡에는 그대로 드러난다. 한편 안익태는 한국 가락을 서양 음악에 접목시켜 작곡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이 같은 시도를 하는 국내 작곡가들도 있었지만, 직접 서양무대에서 공연을 한 것은 안익태가 최초다. 때문에 안익태와 관련해 ‘한국 최초로 우리 가락을 외국에 소개한 인물’이라는 평이 잇따른다. [환] |
참고문헌=안익태(전정임, 시공사), 안익태 그 영광과 슬픔(김경래, 안익태기념재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