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바지 vs 난닝구’ 옛 추억이 솔솔~
구민주계 세력은 같은 해 9월 신당 창당에 반대하며 친노계와 대립각을 세웠다. 난닝구는 러닝셔츠 차림의 한 남성이 당무회의장에 난입해 당 사수를 외치면서 희화화된 단어다. 정치권에선 이때부터 빽바지를 개혁파인 친노, 난닝구를 실용파인 구민주계 세력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참여계와 구민주계 세력이 1차 분화했지만, ‘빽바지·난닝구’ 논쟁은 전당대회 및 신당 창당 때마다 불거졌다. 당내 개혁파와 실용파가 맞붙을 때마다 어김없이 ‘빽바지·난닝구’ 구도가 등장했다. 2005년 4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당시 유 전 장관의 개혁파 그룹은 기간당원제를 무력화한 정동영·염동연 등 실용파를 향해 “당 기강을 무너뜨린 원흉”이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실용파에선 친노계를 ‘빽바지’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표면적으로는 노선투쟁이었지만, 실상은 권력투쟁이었던 셈이다. 유 전 장관은 당시 4위로 중앙상임위원에 입성했다. 17대 국회를 진입한 지 2년 만의 일이다.
2007년 대선 때 대통합민주신당 창당 과정에서도 ‘개혁파 vs 실용파’ 구도는 재연됐다. 유 전 장관 등은 대통합을 주장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을 향해 연일 독설을 퍼부었다. 이에 정 전 장관은 “열린우리당으로 민심을 얻을 수 있겠느냐. 민심은 대통합을 원한다”고 맞받아쳤다. 그러면서 경쟁자였던 손학규 전 상임고문을 겨냥, “한나라당 DNA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승리의 여신은 정 전 장관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그는 18대 대선에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게 500만 표 차이로 대패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10년 10·3 전당대회에서도 ‘개혁 vs 실용’ 구도는 이어졌다. 대선 패배 이후 정치적 잠행에 들어간 정 전 장관은 ‘반성문’을 들고 ‘담대한 진보’ 노선을 선점했다. 분수경제론의 정세균 의원도 천정배 의원도 ‘진정한’, ‘유능한’ 등의 수사를 덧붙이며 진보논쟁에 뛰어들었다. 2008년 총선 이후 춘천에서 칩거한 손 전 고문은 ‘실사구시’ 등 실용주의 정치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유 전 장관은 국민참여당을 창당, 민주당을 탈당한 상태였다. 당 대표는 손 전 고문에게 돌아갔다. 정동영·정세균 의원은 나란히 2∼3위를 차지했다.
2012년 총선 직전 야권 중통합 과정에서는 ‘친노 vs 구민주계’ 구도가 재등장했다. 문재인 대표를 비롯해 ‘이해찬·한명숙’ 등은 야권통합을, 박지원 의원 등 구민주계는 절차상의 이유로 ‘속도전식 통합’에 반대했다. 개혁파가 승리한 야권은 민주통합당을 창당한 뒤 한명숙 체제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민주통합당은 2012년 총·대선에서 참패했다.
새정치민주연합 한 관계자는 “10년 전의 권력투쟁 산물인 ‘빽바지 vs 난닝구’ 논쟁은 지금도 당 안팎에 존재한다”며 “우리 당이 친노·호남 구도를 깨지 못할 경우 수권 정당화는커녕 당이 사분오열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