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범행 후 편한히 낮잠 ‘아리송’
이 씨와 같이 치매에 걸린 90대 노인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발적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치매는 뇌손상으로 인지 기능의 장애가 생겨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최근 폭력성 강한 치매 범죄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4월 부산에서는 요양원에 입원 중이던 70대 치매 노인이 같은 방에서 생활하던 환자를 목 졸라 살해했다. 같은 해 9월, 경기도 안성의 요양병원에선 70대 노인이 동료 환자를 살해해 구속됐다. 과연 파주 사건도 그랬던 걸까.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지난 23일 <일요신문>은 파주경찰서를 찾았다.
“이 씨에 대해 구속영장 신청을 할지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90대 노인 살해 사건’에 대해 묻자 경찰 관계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경찰은 “이 씨의 치매 증세 때문에 영장신청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치매는 의사능력의 완전 상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의료진 검진 등을 종합한 결과, 우리는 이 씨가 범행을 저지를 의사능력이 있다고 봤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 씨를 구속 수사했고 살인 혐의로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에게 평소 치매 증상이 약간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의학적으로 치매 판정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이 씨가 간혹 귀가 들리지 않아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고 거동이 조금 불편했지만 정상적인 활동엔 지장이 없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씨의 범행을 치매 노인에 의한 우발적 살인이 아닌, 정상인이 저지른 일반적인 살인 범죄로 본 것이다. 구속영장을 발부한 법원 역시 이 씨에 대해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구속 상태에서 검찰로 넘어간 이 씨는 구속적부심을 통해 석방, 불구속 기소됐다. 지난 26일 검찰 관계자는 “현재 법원에 구속적부심 청구가 돼서 이 씨가 석방된 상태다. 불구속 수사를 벌여 살인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며 “구속적부심 청구 주체를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가족이 신청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방 사유는 ‘건강 상태’였다. 연세가 90세 정도 되니까 약간 치매 증상뿐 아니라 아주 정정하시진 않았을 거다. 거동도 어려운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를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사건 발생 당일인 6일 오후 2시경,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이 외출해 노부부는 단둘이 남았다. 평소 부부사이도 좋았다고 한다. 또 언론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이 씨의 부인은 성당과 노인정을 ‘아주 가끔’ 찾았다고 한다. 경찰은 “그날도 할머니가 모처럼 나갔다. 사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밖에 나가는 걸 싫어했다.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살해했다”며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돌봐주길 바랐던 듯하다. 할머니가 나가면 자기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씨가 범행에 사용한 둔기의 정체는 망치였다. 이 씨는 아내를 망치로 살해한 뒤 시신을 둔 채 집에서 평소처럼 낮잠을 잤다. 경찰은 이 부분에 대해서 “물론 정상인이든 아니든 살해를 했다면 그렇게 편하게 잘 수는 없다”고 의문을 드러냈다.
이 씨의 아들은 효자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는 또 다른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외출 후 집으로 돌아온 아들이 어머니 시신을 보고 격분한 것.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이 아버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직감한 그는 곧바로 아버지를 폭행했다. 경찰은 “극한 상황을 봤기 때문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했던 행동과 비례할 만큼의 폭력을 가했다”고 밝혔다.
사건은 여전히 미스터리 투성이다. 우선 범행 동기. ‘할머니의 잦은 외출’은 사실도 아닐뿐더러 잔혹한 살해 동기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평소 부부 사이에 특별한 문제도 없었다고 한다.
경찰이 고심했듯 이 씨의 치매 정도와 범행의 연결고리도 애매하다. 특히 이 씨가 범행 뒤 낮잠을 청한 사실이 그렇다. 통상 범인은 발각될까 두려워 범행 현장을 떠나기 마련이다. 범인이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더라도 그 목적은 범행의 은폐를 위한 경우가 많다. 이 씨는 범행 현장을 떠나지도, 시신을 유기하는 등 현장을 훼손하지도 않았다. 사건의 원인을 치매로 돌리기도 어렵고 치매 이외에 다른 원인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공은 재판부로 넘어갔다. 법은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까.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