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하고 뛰고 아빠 빈자리 채우는 삼성 남매
삼성서울병원(위)과 제주신라호텔.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지난 6월 2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전격적으로 직접 대국민사과에 나섰다. 삼성 관계자들은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뜻이 워낙 완강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 부회장의 ‘결심’이었다는 뜻이다. 그럼 무엇이 이 부회장을 나서게 만든 것일까. 일단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했다는 관측이 가장 많다.
재계 관계자는 “오랜 기간 삼성의 후계자로 인식돼 왔지만, 정작 뚜렷한 성과물이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의 진원지인 양 받아들여지는 마당에 뭔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 것 아니겠느냐”고 해석했다.
이 부회장은 최근 삼성의 1인자만이 맡아온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삼성서울병원은 이 재단의 관할이다. 그룹과 달리 ‘넘버2’가 아니라 ‘넘버1’이다.
엘리엇펀드와의 승부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증시의 한 관계자는 “어차피 삼성과 엘리엇펀드의 표 대결에서는 소액주주의 표심이 절대적이다. 이 부회장 사과 불과 하루 후에는 국민연금이 제일모직-삼성물산과 합병구조가 비슷한 SK C&C-SK의 합병에 반대입장을 밝혔다. 삼성이 미리 국민연금 분위기를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액주주의 표심을 포함한 여론을 잡지 못하면 이번 승부에서 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잇따른 악재로 동요하는 내부 분위기를 다잡으려는 의도로 풀이하는 시각도 있다. 최고책임자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위기관리의 리더십을 보여주려 했다는 견해다. 이는 이 부회장이 직접 읽은 사과문에서 ‘대대적 혁신’, ‘재발방지를 위한 철저한 조사’, ‘예방과 치료제개발 적극지원’ 등을 공개적으로 약속한 데서도 확인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오른쪽)이 나란히 메르스 사태에 휘말린 가운데, 대처 과정과 관련 엇갈린 평가가 나오면서 눈길을 끌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삼성의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직접 공개적으로 혁신, 조사, 최선의 노력 등을 약속한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직접 챙기겠다는 뜻인데, 삼성서울병원의 혁신이 이 부회장의 첫 작품이 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삼성서울병원의 혁신방향이 앞으로 삼성의 혁신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런데 이 같은 이재용 부회장의 행보에 한 발 앞서 동생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관심을 끌었다. 이 사장은 메르스 확진환자가 제주 신라호텔에서 나오자마자 직접 제주 현지로 내려가 전직원을 격리하고 서울에서 전문의를 불러 방역에 나섰다. 또 제주도 당국이 ‘영업자제’를 요청했는데, 이보다 한 발 더 나가 영업을 전면 중단했다. 게다가 기존 투숙객에 한해 숙박료 환불, 다른 숙박시설 안내 및 항공편 안내 등의 조치를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특히 22일 오후 원희룡 제주지사와 만나 나눈 대화내용이 알려지면서 이 부회장의 리더십도 더욱 부각됐다.
이 사장은 이 자리에서 “속단하긴 어렵지만 메르스가 진정세를 맞고 있는데 이번에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경험한 것, 놓친 것 등 여러 가지를 포함해 백서를 만들고 있다”며 “이를 도내 관광·숙박업체와도 공유하겠다”고 말했다. 또 “제주도와 긴밀히 협조해 영업 재개 시점을 정하는 한편 관광객 유치 등 경제위기 극복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원 지사는 “삼성서울병원이 호텔신라처럼 협조했다면 사태를 훨씬 빨리 진정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내에서도 개혁성향으로 분류되는 원 지사가 이 사장에 대한 극찬과 동시에 삼성서울병원에는 직격탄을 날린 셈이다.
이 사장은 2009년부터 직접 호텔신라와 에버랜드(현 제일모직의 레저부문) 경영을 도맡아왔다. 특히 면세점사업을 크게 성공시키며 삼성의 유통부문 주력 사업으로 키웠다.
다만 지난해 5월 이건희 회장이 병석에 누운 이후에는 이 사장의 운신이 부쩍 신중해졌다. 이 부회장의 후계 승계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살지 모른다는 점을 주의했다는 게 삼성 주변의 전언이다. 남편인 임우재 씨와의 이혼소송도 한동안 이 사장으로 하여금 대외활동을 자제토록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삼성의 후계가 이재용 부회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후계구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어머니인 홍라희 여사의 뜻도 확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사정에 밝은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부진 사장 몫으로 유력했던 화학부문을 삼성테크윈 매각에 덤으로 끼워 매각했다. 이 부회장 입장에서는 아버지에게서 세 자녀로 분할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두 동생에게 사업부문을 떼어주는 형식을 택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후계구도에서도 철저하게 이 부회장 단독체제가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이부진 사장이 가진 지분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룹 지주격인 제일모직 지분을 보면 이 부회장이 23.24%, 이부진·서현 자매가 각각 7.74%다. 삼성계열사 지분이 약 10%에 달하지만, 사실상 삼성전자 영향권 아래에 있는 지분으로 세 남매 모두에게 특수관계인이 될 수 있다.
만약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이 현재 안대로 합병이 되면 이 부회장의 지분은 16%대로 떨어진다. 만에 하나 엘리엇펀드의 주장이 반영돼 합병비율이 재조정된다면 지분율은 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이 부회장이지만 확고한 경영권 행사를 위해서는 두 여동생의 도움이 절실한 셈이다.
재계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이부진·서현 자매가 제일모직 및 삼성SDS 지분을 이 부회장 쪽에 넘기고 레저와 유통 및 패션 부문의 경영권을 넘겨받는 시나리오가 가장 유력하다. 하지만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이 좌절되면 이후 후계구도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현재로서는 그 어떤 형태도 예단하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으로서는 그룹 지배력이 공고할수록 두 동생과의 ‘분할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다. 반면 이부진·서현 자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가진 제일모직과 삼성SDS 지분의 가치가 높아질수록 협상력도 극대화될 수 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