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섭 기자의 연예편지 열두 번째
영화 촬영 현장에서 벌어진 성추행 사건. 이번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 금천경찰서는 지난 4월 어느 영화 촬영 현장에서 벌어진 남자 배우 A의 여배우 상의 단추를 뜯은 혐의(강제추행)의 사건을 수사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A가 여배우 B의 상의 단추를 뜯은 것은 물론 영화 속 한 장면입니다. 말 그대로 연기인 것이지요. 영화에선 이보다 더 한 신체 접촉도 빈번하게 이뤄집니다. 아니 전라 상태에서의 베드신도 촬영이 이뤄집니다. 그렇지만 연기는 사전에 감독과 배우들이 합의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것인 만큼 이를 성추행이라 분류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 <빈집> 스틸 컷.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그런데 이번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당시 촬영 내용은 남편이 새벽에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아내를 폭행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배우 B의 상의 단추까지 몇 개 뜯어내는 행동은 사전에 합의된 내용이 아닙니다. 결국 여배우 B는 대본에 없는 내용이며 사전 합의도 없이 이런 행위를 한 것은 성추행이라며 지난달에 경찰에 남자 배우 A를 고소했습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A는 해당 행위가 연기 도중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연기의 일환이었을 뿐 성추행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게 A의 주장입니다. 경찰은 피해자 조사와 피의자 조사를 마치고 감독 등 당시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도 참고인으로 소환해서 조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당시 촬영 영상 역시 넘겨받아 검토 중입니다.
이제 중단은 없습니다. 과거엔 사과과 합의로 피해자가 소를 취하해주는 것으로 마무리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성관련 범죄는 친고죄가 아닌 터라 합의로 소가 취하돼 사건이 종결되지는 않습니다. 합의가 이뤄져도 수사는 끝까지 진행됩니다.
매우 모호한 대목입니다. 우선 보다 사실적인 연기를 위해 극중 상황과 캐릭터에 몰입한 나머지 상의 단추를 뜯어내는 연기를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연기에는 대사 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애드리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몰입된 상황에서의 사실적인 연기를 핑계로 은연 중에 성추행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 사건은 이 두 가지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 현장은 철저한 사전 협의를 통해 서로 교감이 이뤄진 상태에서 연기가 진행됩니다. 베드신의 경우 노출 수위는 기본, 남녀 배우의 신체 접촉의 강도와 빈도 등도 모두 사전 합의가 이뤄집니다. 어느 포인트에서 어느 정도의 노출이 이뤄지며 어떤 방식으로 배우들의 신체가 접촉하며 어느 정도의 행위가 이뤄질 때 어떤 반응이 이어지는 지를 모두 정해 두고 촬영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신이라고 다 벗은 남녀 배우가 현장 분위기에 따라 정사 장면을 연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작은 움직임과 반응 하나하나까지 모두 정해진 데로 이뤄지는 셈이지요.
이런 사전 합의가 더욱 중요한 대목은 액션 장면입니다. 액션 장면에선 서로의 약속된 움직임이 완벽하게 구사되지 못할 경우 부상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소위 합을 맞춘다는 표현이 자주 사용됩니다.
영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스틸 컷.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그런데 이번에는 장면부터 조금 모호합니다. ‘술에 취한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는 장면’이니 베드신처럼 애정행위를 다룬 장면은 분명 아니고 폭행이 이뤄지긴 하지만 서로 합을 맞추는 액션 장면도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사전 합의가 매우 디테일하게 이뤄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뤄진 남자 배우의 여자 배우 상의 단추를 몇 개 뜯는 행위가 이뤄졌습니다. 캐릭터와 상황에 몰입한 나머지 이뤄진 조금 지나친 애드리브 연기였는지 의도적인 성추행인지가 매우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법조계에선 남자 배우 A가 불리하다는 입장입니다. 성추행의 경우 가장 중요한 요건이 피해자의 진술입니다. 이번 사건의 경우 여느 성추행 사건과 달리 증거와 증인이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변호사들은 당시 영상과 목격자 등의 증거보다 피해 여성의 진술이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특정 행위(상의 단추를 뜯는)의 존재 자체를 다투는 상황이라면 당시 영상과 목격자 진술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이번 사건의 핵심은 당시 남자 배우 A에게 성추행 의도가 있었는 지와 당시 여자 배우 B가 성추행을 당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여부가 중요합니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여배우의 진술입니다. 행여 성추행 의도가 있었을 지라도, 반대로 전혀 성추행 의도가 없었을 지라도 남자의 진술은 ‘모두 성추행 의도가 없었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성관련 사건에서 피해자가 고소 내용을 일관되게 주장한다면 경찰 단계에선 기소 의견 검찰 송치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경찰이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기 위해선 성추행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거나 고소인의 진술이 오락가락하는 등 신빙성이 없다는 명확한 정황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 다음 단계는 검찰입니다. 그렇지만 검찰 역시 피해자가 일관되게 성추행 피해를 주장하면 기소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변호사들의 공통된 설명입니다. 정식 재판까지 가진 않더라도 약식 기소로 유죄 처벌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만약 A가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고 반선하는 모습을 보이고 B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기소유예 처분이 나올 가능성이 있지만 A가 성추행이 아니라는 주장을 유지한다면 정식 재판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약식 기소 처분을 받을 경우에도 A가 불복하면 정식 재판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영화 <레드카펫> 스틸 컷.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서로 오해를 풀고 B가 당시 상황은 성추행이 아닌 연기로 받아들이며 입장을 바꾼다면 재판까지 가지 않고 상황이 조기에 종료될 수도 있습니다. 증거 불충분 등으로 검찰이 불기소처분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친고죄 폐지로 지금은 합의만으로 소가 취하되진 않습니다. 따라서 A가 성추행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검찰의 불기소처분이 유일합니다.
따라서 현재 가장 중요한 부분은 A와 B의 진솔한 대화라고 생각됩니다. A는 성추행이 아닌 데 이런 상황에 처한 게 답답할 수 있겠지만 뭔가 오해가 있다면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연기지만 부부 사이였던 동료 배우가 불쾌한 감정을 느껴 경찰에 고소까지 했다면 그 불쾌한 감정은 풀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B 역시 행여 본인이 뭔가 오해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한 번쯤 A와 진솔한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연기에 몰입했다는 A가 억울할 수도 있고, 성추행 당했다는 느낌을 받아 고소까지 진행한 B가 피해자일 수도 있는 사건입니다. ‘연기 도중 벌어진 성추행 사건’이라는 매우 독특한 사건인 터라 더욱 그렇습니다. 자칫 이번 사건에서 유죄 판결이 나올 경우 배우들의 연기가 경직될 수 있으며 감독 등 연출자의 작품 활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연기 도중이라고 성추행이라 여길 만한 상황을 무조건 여배우에게 참으라고 말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이 연기 도중에 벌어질 수 있는 성추행에 대한 연예계 전체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