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1. 연기와 성추행의 모호한 경계선
사건이 발발한 것은 지난 4월이다. 사건 현장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영화 촬영장이었으며 당시 두 배우는 연기 중이었다. 문제의 장면은 남편 역할의 남자 배우 B가 부인 역할의 여배우 A를 폭행하는 장면이다. A가 잦은 가정 폭력의 피해자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건 초기 매스컴을 통해 B가 A의 상의 단추를 뜯는 등 대본에 없는 연기를 한 부분이 문제라고 알려졌다. 그렇지만 여배우 A는 잘못 알려진 내용이라고 반박한다.
“그날 입은 의상은 단추가 없는 티셔츠였어요. 그러니 단추를 뜯었다는 내용은 잘못된 것이죠. 촬영을 앞두고 감독님의 연기 디렉션은 상의를 잡아 당겨 어깨와 목 부분이 살짝 드러나는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그 부위에 상습적인 가정 폭력을 상징하는 멍을 그려 넣었고요. 그런데 촬영이 시작되자 B 씨가 티셔츠를 아예 찢어버렸어요. 게다가 브래지어까지 찢어버렸죠. 이후 과격한 추행으로 제 몸에 상처까지 생겼어요.”
피해자인 여배우 A의 성추행 당시 정황에 대한 주장이다. 당시 벌어진 일에 대해선 가해자인 남자 배우 B도 경찰 조사에서 거의 인정했다고 알려졌다. 게다가 당시 모습은 카메라로 모두 촬영돼 있어 수사기관에 증거로 제출된 상태다. 또한 감독과 촬영 감독 등 현장 스태프들이 모두 목격자다. 다만 B 측은 당시 정황을 성추행이 아닌 연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연기였을 뿐 성추행 의도는 없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
영화 관계자들은 사전 리허설 등 합의 과정을 벗어나는 장면일지라도 연기에 몰입하다 보면 더 좋은 장면을 만들기 위한 어느 정도의 애드리브는 있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2. 시나리오를 통해 본 문제의 장면, 핵심은 멍
그렇다면 해당 영화의 시나리오에는 문제의 장면이 어떻게 적혀 있을까. <일요신문>이 입수한 해당 영화 시나리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3 ○○의 집 (d)
‘표정 없이 저항하는 ○○을 그대로 제압하고는 거실 벽으로 밀어 ○○의 바지를 내리는데 좀처럼 벗겨지지가 않는다. 잔뜩 독기가 서린 △△이 ○○의 바지를 찢어 내린다. ○○의 몸 구석구석에 오래된 멍들이 독버섯처럼 배어있다. ○○을 돌려 벽에 붙이고는 뒤에서 하이에나 같은 신음을 한다.’
여기서 ○○으로 표시한 것이 여배우 A의 캐릭터이며 △△이 B의 캐릭터다. 본래 시나리오에선 바지를 찢어 내리는 것이 해당 장면 폭력 장면의 핵심이다. 그렇지만 영화 촬영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지만 세부 콘티와 현장 합의 등을 통해 촬영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곤 한다.
피해자인 A는 “촬영을 앞두고 감독님과 B 씨 등이 모여 해당 장면에 대해 얘기를 나눴어요”라며 “상반신과 얼굴 위주로 촬영을 진행하기로 했고 상의를 잡아 당겨 어깨 부분에 그려 놓은 멍이 살짝 드러나는 수준으로 합의가 됐어요”라고 밝혔다.
시나리오를 놓고 볼 때 해당 장면의 핵심은 ‘멍’이다. ‘몸 구석구석에 오래된 멍들이 독버섯처럼 배어있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멍을 통해 오랜 기간 상습적인 폭행이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나리오에는 또 한 번의 폭행 장면이 나온다. 이런 내용이다.
#77 ◇가게 안 (n)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의 블라우스를 찢기 시작한다. 상의가 벗겨지자 온몸 여기저기에 멍의 흔적들이 먹물처럼 퍼져있다. 처절하게 반항하는 ○○의 절규와는 상관없이 ○○의 뺨을 거세게 내리치는 △△의 눈빛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는 ○○은 △△의 움직임에 그대로 이끌린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래 전부터 익숙하게 길들여진 행위처럼 처연하게 흘러간다.’
이 장면 역시 멍이 중심이다. 이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두 번의 폭행신은 모두 상습적인 가정 폭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게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장면에서 노출의 중심 역시 멍이다. 따라서 여배우의 몸 어디에 멍을 그려 놓았는지가 사전에 협의된 노출 수위라고 볼 수 있다. A는 어깨와 목 등 상반신 윗부분 세 군데에 멍을 그려 놓고 촬영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오히려 상의를 찢어선 안된다. 이를 통해 여배우의 신체 노출이 많아질 경우 멍이 없는 부위까지 드러나게 된다. 시나리오를 놓고 보면 몸 구석구석에 오래된 멍이 있어야 하는 데 상의가 찢어져 드러난 몸에 멍 자국이 없다면 이는 감독의 의도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장면이 되고 만다.
물론 시나리오만 놓고 보면 남자 배우 B 측도 항변할 구석이 있다. 배우들은 사전에 시나리오를 통해 본인의 캐릭터를 분석하고 출연 장면의 연기를 시뮬레이션한다. 바지를 찢고 상의를 찢는 두 개의 폭행 신은 출연 분량이 많지 않은 해당 캐릭터 △△에게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따라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캐릭터와 장면에 대한 사전 분석을 철저히 한 것이 촬영 현장에서의 몰입된 연기로 이어져 그런 애드리브 연기가 나왔을 수도 있다.
3. 연기 영역 밖 성추행 두고 이견
문제는 피해자 A가 주장하는 성추행이 이 외에도 더 있다는 부분이다. 티셔츠와 브래지어 등을 찢는 상반신에서의 성추행과 동시에 바지를 벗기려고 하는 등의 하반신에 대한 성추행도 있었다는 것.
A는 “그 장면을 찍으며 B 씨가 억지로 바지까지 벗기려고 했어요. 원래 하반신은 촬영을 하지 않으니 시늉만 하기로 했었거든요”라며 “그래서 제가 바지를 벗기지 못하게 저항했어요”이라고 말했다.
다만 바지를 벗기려 하는 등의 하반신 관련 성추행에 대해 B 측은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벌어진 상황이지만 하반신 관련 성추행은 연기 영역을 벗어난 부분이다. 영화와 드라마 등 카메라를 활용한 연기의 핵심은 카메라다. 실제로 클로즈업과 바스트샷 등 얼굴과 상반신 위주의 촬영을 할 때에는 배우들이 하의는 대충 입기도 한다. 예를 들어 더운 여름 날 사극을 촬영할 때 종종 상의는 제대로 갖춰 입지만 하의는 반바지 등 편한 복장만 입기도 한다. 카메라에 담기는 부분은 얼굴과 상반신 등으로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이날 촬영 역시 얼굴과 상반신 위주로 촬영을 진행했기 때문에 바지를 벗기려 하는 등 하반신 관련 성추행이 벌어졌다면 이는 연기 영역을 벗어난 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선 증거도 증인도 없다. 우선 촬영된 영상은 얼굴과 상반신 위주로 촬영돼 하반신은 찍히지 않았다. 모니터로 촬영 장면을 본 감독 등 스태프들은 당연히 하반신 쪽에서 벌어진 일은 보지 못했다. 촬영 현장에는 촬영감독과 보조 등 단 두 명이 있었는데 그들 역시 카메라 렌즈에 집중하고 있어 카메라 밖에서 하반신 부분에서 이뤄진 행위는 볼 수 없었다.
경찰 조사에서 B 측은 하반신 부분에서 이뤄진 성추행은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선 피해자 A의 진술이 전부다. 성추행 사건에선 다른 증거가 없을지라도 피해자의 진술이 증거 능력을 갖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결국 이번 사건은 카메라 안에서 벌어진 ‘연기 도중 성추행’과 카메라 밖에서 벌어진 ‘연기 영역이 아닌 성추행’을 두고 각각의 의견 대립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벌어진 일이지만 연기 영역의 안과 밖으로 구분이 돼 있으며 증거(촬영 영상)와 증인(촬영 스태프)의 유무도 각기 다르기 때문에 만약 이 사건이 법정 다툼까지 가게 될 경우 이를 두고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