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하나 나 하나’…미워도 다시 한번
문재인 대표가 당직개편 과정 박지원계와 김한길계를 끌어안으며 친노계와 비노계 간 ‘전략적 제휴’를 꾀했다. 박지원 의원, 문재인 대표, 김한길 의원(왼쪽부터)이 2013년 12월 5일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3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이들의 불완전한 동거는 친노계 좌장인 문재인 대표와 비노계 대표 격인 박지원·김한길 의원이 이끌었다. ‘최재성 사무총장 카드’를 둘러싼 갈등의 여진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갈등의 화약고를 안은 ‘김상곤 혁신위원회’의 순항은 불안정했다. 이 가운데 문 대표가 승부수를 던졌다. ‘박지원·김한길’ 의원 등 비노계에 SOS를 친 것이다. 당내 최소 4개 그룹 분당 및 신당그룹 존재를 폭로해 당의 원심력을 이끈 박 의원도, 호시탐탐 중도신당 가능성을 엿본 김 의원도 ‘일단’ 문 대표의 손을 잡았다.
‘비노계의 전진배치’와 ‘천정배계의 약진’으로 요약된 새정치연합의 당직 인선이 나온 배경이다. ‘5본부장(조직·총무·전략홍보·디지털소통·민생본부장)+1정책위의장’ 체제는 범주류 3명(최재성 ·안규백·홍종학)과 비주류 3명(이윤석·정성호·최재천)이 꿰찼다. ‘탕평책’이면서 동시에 ‘철저한 계파 나눠 먹기’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 셈이다.
이 그림의 첫 단추는 문 대표가 맞췄다. 최 의원 사퇴 이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조직본부장’에 박지원계인 이윤석 의원을 임명했다. 조직본부장은 개편된 당직의 ‘핵심 포스트’다. 그간 비노계는 최 의원 사퇴에도 불구하고 문 대표가 범친노 중 한 명을 내리꽂을 수 있다는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당직 명칭만 변경될 뿐 ‘친노를 위한, 친노에 의한, 친노의’ 당직 인선으로 귀결될 것이란 주장도 이 지점에서 파생했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문 대표는 당직 인선 발표(지난 22일)를 앞두고 박 의원과 물밑에서 교감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이윤석 카드가 부상했다. 이 의원은 박지원계의 핵심이자 원내수석부대표다. 전 수석대변인이자 전남도당위원장 등도 역임했다. 다만 최근 이 의원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올해 초 전남도당위원장 선거에서 초선인 비노계 황주홍 의원에게 패했다. 변화를 원하는 호남 정서에 박지원계의 위상도 흔들렸다.
친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차기 총선 공천에서 ‘호남 물갈이론’이 당을 강타할 경우 ‘뒷방 노인네’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을 구원열차에 태웠다. ‘포스트 사무총장’ 당직인 조직본부장에 이윤석 카드를 선택한 것은 ‘호남정치 복원’의 의미가 크다. 호남에 약한 고리를 가진 문 대표가 전남과 광주 등에 영향력을 가진 박지원계를 끌어안으면서 4·29 재·보궐선거 이후 장기화한 계파 갈등을 정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김한길계도 전진 배치했다. 민생본부장에 정성호 의원을 비롯해 정책위의장에 최재천 의원을 임명했다. 전략홍보본부장에는 구주류인 안규백 의원, 디지털소통본부장에는 범주류인 홍종학 의원을 각각 선임했다. 친노계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문 대표가 대탕평책을 시도하면서 비노계에 러브콜을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 당직자도 “지난 5월 중순께 발발한 문 대표의 글 유출 파문을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당시 문 대표는 ‘당원 여러분께 드리는 글’에서 “지도부 흔들기가 도를 넘었다”며 비노계를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자 김한길 의원은 문 대표의 인식을 놓고 “편 가르기이자 갈라치기 분열 프레임”이라고 맞받아쳤다.
옛 천정배계 인사들이 이번 당직 인선에 포진된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비노계 정책위의장 카드를 밀어붙인 이종걸 원내대표를 비롯해 정성호·최재천 의원은 지난 17대 국회 때 ‘민생정치모임’(민생모)에서 활약했다. 이들은 비노계 이외 ‘율사 출신’이란 교집합도 가지고 있다. 이 원내대표는 비공개석상에서 당내 인사들에게 “천 의원은 (신당 문제는) 내게 맡겨 달라”는 말을 자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문 대표가 야권발 정계개편의 상수인 ‘천정배 신당’ 바람의 차단용으로 ‘정성호·최재천’ 카드를 쓴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비노계 한 관계자는 이번 인선과 관련해 “겉으로 힘의 균형을 맞추면서 당 원심력을 꺾는 데 주력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당직 인선을 통해 분열된 당심을 수습하는 한편, 확산하고 있는 신당론의 불씨를 끌 수 있는 ‘1석2조’ 카드라는 것이다.
친노 내부에선 당직 인선 과정에서 문 대표의 ‘장렬 전사론’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표의 기득권을 쥔 채 차기 총선에서 이기느니, 비노계에 지분을 나눠주더라도 명예스러운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불명예스럽게 길을 걸으면서 총선 승리를 하는 게 아니라 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훈처럼 ‘통합’을 고리 삼아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겠다는 얘기다. 문 대표도 “대표 임기는 총선까지다. 마지막 죽을 고비에서 장렬하게 산화할 각오로 총선을 이끌겠다”며 “그 결과에 책임을 지겠다. 저의 정치 생명이 총선 성적에 달렸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문제는 문 대표의 카드가 고육지책이라는 점이다. 친노계는 계파 갈등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 임시방편인 ‘철저한 나눠 먹기’를 택했다. 계파 갈등에 대한 반성과 성찰 없이 ‘문재인-박지원-김한길’ 체제가 당분간 공조행보를 보이면서 20대 총선 공천을 향해 개문발차를 선택한 것이다. 일각에선 2012년 총·대선 당시 ‘이해찬-박지원’ 담합을 연상케 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비노계 당직자 출신인 한 관계자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계파 갈등의 불씨는 조만간 올라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변수는 2012년 총선 공천 때도 갈등의 기름을 부었던 ‘정체성’,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 등 공천 룰이다. 전자는 ‘성장이냐, 분배냐’의 경제정책의 원론부터 증세와 복지의 균형 등 디테일까지, 당의 구석구석을 찌를 칼날이다. 경우에 따라 ‘노선투쟁과 이념투쟁’이 격화되면서 위험한 동거를 꾀한 이들이 ‘루비콘 강’을 건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신당파인 박주선 의원은 “문 대표의 세월호 동조 단식 때문에 재보선에서 패했다”며 이념투쟁에 불을 지폈다.
문 대표의 고심을 깊게 하는 오픈프라이머리는 제1야당의 오랜 과제인 ‘당심과 민심’의 충돌지점이다. 전북도당위원장인 비노계 유성엽 의원은 문 대표를 향해 “단수공천을 폐지하고, 미리 선정된 선거인단이 자격심사를 거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토론을 실시해 최종 후보자를 정하는 ‘숙의 선거인단’ 경선제를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친노 내부에선 숙의 선거인단 경선제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전해졌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 급한 친노계는 ‘지역패권’에 머물러있는 호남정치 복원을 택했고, 비노계는 ‘자기 사람 꽂기’로 전근대적인 하청정치의 민낯을 보여줬다. 친노계와 비노계 모두 생존을 위해 혁신이란 명분을 저버린 셈이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