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직원 진술 철회…“회유·협박 있었다”
스티븐 바넷 AIG손해보험 사장은 뉴욕 본사에 성희롱 사건을 잘 해결할 수 있다고 어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제공=AIG손해보험
지난 7월 22일 인권위에서는 스티븐 바넷 AIG손보 사장의 ‘성희롱’ 혐의에 대한 심의위원회가 열렸다. 결과는 ‘보류’ 판정이었다. 보류 판정은 이번이 두 번째다. 앞서 지난 6월 17일 열린 심의위원회에서도 보류 판정을 내린 바 있다.
인권위에 ‘성희롱’ 진정서가 제출된 것은 5개월 전인 지난 2월이다. AIG손보의 여성 임원으로 재직한 A 씨는 바넷 사장이 자신을 비롯한 여성 임직원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성희롱 및 인격 모욕을 했다고 주장했다.
공소시효 문제로 인권위에 정식으로 진정이 들어간 사건은 20대 여직원 B 씨가 겪은 두 번의 성희롱 혐의였다. 지난해 2월 7일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AIG 한국진출 60년 기념식 행사’에서 바넷 사장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B 씨에게 “You look like a vamp(너는 요부처럼 생겼다)”고 말했다고 한다. ‘Vamp’는 ‘요부’라는 뜻으로, 남자에게 기생해 사는 꽃뱀의 의미로 쓰인다.
진정서에는 바넷 사장의 이 발언으로 당사자인 B 씨뿐만 아니라 옆에서 발언을 지켜본 A 씨까지 성적 모멸감과 굴욕감을 느꼈다고 적시돼 있다.
B 씨에 대한 바넷 사장의 성희롱은 며칠 후 또 벌어졌다. B 씨가 바넷 사장실 앞 복도를 지나가는데 바넷 사장이 사장실에서 B 씨의 이름을 부르며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사장실에 들어간 B 씨는 “사장실에서는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텐데 어떻게 누구인지 알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바넷 사장은 “I recognize you by your legs(너의 다리를 보고 알아봤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 말에 수치심을 느낀 B 씨는 바로 A 씨를 찾아가 “사장에게 연이어 성희롱 발언을 들으니 회사를 더 이상 다니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진술서에는 바넷 사장이 여성 임직원의 신체를 접촉하거나 “I’ll soften you(내가 너를 부드럽게 만들어주겠다)” “Who would sit on my lap to Seoul(누가 내 무릎 위에 앉아 서울까지 갈래” 등 성적 수치심을 느낄 만한 발언을 수차례 했다고 적혀있다.
결국 여성임원 A 씨와 여직원 B 씨는 지난해 AIG손보를 퇴직했다.
진정서를 제출한 지 4개월이 지난 뒤 열린 지난 6월 17일 심의위원회에서 한 차례 보류 판정을 내려진 뒤 사건에 변수가 발생했다. 직접 피해를 당했다며 진술서를 작성한 B 씨가 진술을 철회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B 씨는 A 씨에게 사건이 길어지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 송사를 그만하고 싶다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특히 B 씨는 AIG손보의 한 직원에게 “회사가 A 씨와 B 씨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 등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철회하면 너에겐 추후에 피해가 안 가게 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전해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진술 철회 회유 내지는 압박으로 볼 수 있는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A 씨는 B 씨의 인권위 진술 철회를 만류했지만, 결국 B 씨는 재심의를 일주일 앞두고 인권위에 진술을 철회했다. 인권위에서는 피해자가 더 이상 조사 절차를 원하지 않을 경우 사건을 ‘각하’ 종결한다.
이에 A 씨 측은 심의위원회를 앞둔 지난 20일 B 씨가 회사 측의 회유성 발언이 있었다는 녹취록과 함께 의견서를 제출했다. A 씨는 “직접 성희롱을 겪은 피해자가 진술을 철회했다고 하더라도,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진정인도 간접적으로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진정인을 간과하고 사건을 이대로 각하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권위 재심의위원회에서는 다시금 보류 판정을 내렸다. 다만, 재심의위원회는 “피해자가 진술을 철회하게 된 경위를 더 조사해보겠다”며 이번 ‘보류’ 판정을 내린 배경을 설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인권위가 성희롱 사건에 대해 5개월 넘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고 있는 형국이다. 앞서 지난 6월 첫 번째 보류 판정이 나왔을 때도 재심의는 굉장히 이례적인 결정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에 대해 인권위 관계자는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면 인권위에서는 사건에 대해 결과가 나오기까지 오래 걸린다”며 “바넷 사장의 성희롱 혐의 사건은 아직 심의가 진행 중이라 자세히 말하기 어렵다”며 말을 아꼈다.
AIG손보 뉴욕 본사에서도 바넷 사장 성희롱 혐의 사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실제 바넷 사장은 지난 6월 열린 인권위 심의위원회에 직접 출석해 ‘성희롱’ 혐의에 대해 강하게 항변했다고 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바넷 사장의 법률 대리인인 법무법인 김앤장이 힘을 많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인권위에서는 이번 바넷 사장 성희롱 혐의 사건에 대해 오는 8월 소위원회를 다시 열겠다고 통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