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에도 술에도 슬쩍 ‘CCTV 있었다면…’
‘농약 사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경북 상주의 한 마을회관을 경찰들이 통제하고 있는 모습. 아래는 수사본부 전경.
지난 2012년 1월 5일 오후 5시 40분경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내정마을의 한 마을회관에서 식사를 마친 노인들이 배를 움켜쥐기 시작했다. 6명의 노인들은 구급차에 실려 각 지역의 대형 병원으로 긴급 후송돼 사경을 헤맸다. 결국 정 아무개 씨(여·72)는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고 나머지 5명은 가까스로 의식을 찾았다.
최근 일어난 ‘상주 농약 사이다 살인사건’의 복선이었을까. 상주의 할머니 6명이 마셨던 사이다에서 발견된 농약은 맹독성 살충제인 ‘메소밀(methomyl)’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함평 마을회관의 노인들이 함께 먹었던 비빔밥에서도 메소밀이 발견됐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비빔밥 재료인 상추겉절이, 간장, 고춧잎에선 농약 성분이 나오지 않았지만 흰밥에서 메소밀이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메소밀 자체가 무색무취한 농약이다. 음식물에 넣어버리면 전혀 느낄 수가 없으니까 같이 음독을 할 수밖에 없다”며 “누군가 고의로 피해자 총 6명 중 1명을 제거하기 위해 치밀하게 약을 타서 같이 먹게 한 사건”이라고 밝혔다.
함평 사건 발생 두 달 뒤 경찰이 가까스로 특정한 용의자는 숨진 정 씨의 남편 이 아무개 씨(74). 경찰은 이 씨가 살충제 농약을 두 번 구입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반면 이 씨는 경찰 조사에서 농약의 사용처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사건이 발생한 그 날 경로당에 들렀던 이유와 그 이후 행적에 대해서도 명확한 진술을 하지 못했다. 이 씨의 거짓말 탐지기 검사 결과도 ‘거짓 반응’이었다.
경찰의 추가 조사 결과, 이 씨가 부인 박 씨와 부부싸움을 자주 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듯했지만 이 씨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경찰은 “그 분은 농약을 구입한 내역이 있었고 마을회관도 자유롭게 출입했다”라며 “사생활 쪽을 캐보니까 살해 동기도 나왔다. 하지만 직접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 때나 지금이나 기소를 못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사건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충북 보은 농약 콩나물밥 사건’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미궁에 빠져 있다. 지난 2013년 2월 20일, 보은군 보은읍 삼산리의 한 음식점에서 노인 6명이 콩나물밥을 먹고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다. 이들은 청주의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닷새 만에 결국 정 아무개 씨(72)가 사망했다. 나머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콩나물밥에 들어간 양념간장에서 메소밀이 검출됐다. 다른 반찬과 콩나물밥에선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몰래 간장에 농약을 탔다는 증거였다.
콩나물밥을 조리한 식당 종업원 A 씨(78)와 식당 주인 B 씨(70)는 양념간장을 조리하지 않았다며 서로 다른 진술을 했다. 사건은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상주랑 비슷하긴 하다. 식당 안에 CCTV도 없었다. 그거 있었으면 벌써 잡았을 텐데”라며 “지금도 수사는 계속하고 있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특별한 증거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이 용의자를 특정해 검찰로 송치했지만 불기소 처분이 나온 ‘독극물 테러 기도’ 사례도 있다. 간접증거만 있을 뿐 직접증거가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지난 2013년 4월 1일. 전북 진안군 용담면의 한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이 만두를 빚고 있었다. 이들이 부족한 재료를 가져온 뒤 다시 돌아왔을 때 만두소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색깔도 노란색으로 변한 상태였다. 마을 주민들은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국과수는 만두소에서 ‘스톰프’라는 제초제 성분을 발견했다. 빈 농약병 밑 부분에서 용의자 C 씨의 지문도 나왔다. 그 농약병에서 채취한 DNA 역시 C 씨의 것과 일치했다.
C 씨도 앞서 사건의 용의자들처럼 경찰 조사에서 마을회관 출입 시기에 대해 엇갈린 진술을 하고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은 C 씨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게 이유였다. 지난해에는 70대 노인이 제주도 서귀포시의 한 노인정에서 농약 소주를 마시고 중태에 빠졌다. 범인은 지금도 잡히지 않았다.
다수를 노리는 독극물 테러가 왜 시골 마을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일까. 앞서의 함평경찰서 관계자는 “시골 같은 경우 노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가족이 없기 때문에 마을회관에서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낸다. 그러다 보면 이해관계로 싸움도 많이 하고 감정이 상하게 되며 오랜 시간 동안 쌓인다. 그러다 한 번에 터지는 것”이라며 “농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원인 중 하나다. 수사를 나가보면 노인들이 농약을 먹고 자살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설명했다. 다른 경찰은 “시골에서 어울리던 분들이 서로 놀다보면 갈등이 있다. 그래서 독극물 사건 같은 게 터지면 일단 마을 주민의 소행으로 수사방향을 잡는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런 사건들이 미궁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 건국대 이웅혁 교수(범죄심리학)는 “시골은 농약을 쉽게 얻을 수 있고 CCTV가 없다. 원한관계가 있는 사람은 이 두 가지를 악용해 충분히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며 “범행현장을 찍은 CCTV가 없는 이상, 시골 마을의 범행은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 미스터리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