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자와 고창 김갑부는 뜻있는 부자들을 발기인으로 모았다. 그중 한 사람인 파주 교하의 대지주 박용일은 일본 유학생이면서도 평소에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는 소박한 성품이었다. 그는 민족을 위한 사업이라면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 그 외 동래 구포 출신의 윤상은, 영광 출신 조계현, 대구 출신 이일우 등이 힘을 합쳐 조선인만의 주식회사를 추진했다.
국어학자 이희승이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다. 고창 갑부 김경중의 아들 김성수가 운동을 이끌었다. 조선인 부자들은 세우는 회사를 한 개인이나 몇몇 소수인의 소유가 아닌 전 민족의 회사로 만들자고 했다. 주식 공개모집을 해서 조선인들 사이에서 1인 1주 운동이 벌어졌다. 주식 한 주를 사면 일 회 불입금으로 12원 50전을 내야했다. 쌀 두 가마 값이었다. 고창 김갑부와 경주 최부자의 민족기업 설립은 조선상품애용운동이나 일화배척과 마찬가지 차원의 일로 평가 받았다. 그들은 주식이 뭔지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전력을 기울여 일반주식모집에 나섰다. 좋은 부자의 자식들이 전국의 벽지까지 돌아다니며 주식의 공유를 권했다.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식에 대해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독립운동자금을 희사한다는 기분으로 돈을 냈다.
2만 주 발행에서 일반 공모주가 1만 6210주였다. 주주 수는 500주 미만의 주식을 가진 주주가 주주총수 188명의 95.7퍼센트인 180명이고 그들이 가진 주식수는 주식총수의 63.5퍼센트였다. 일제 강점기에 그렇게 조선민족만의 회사가 탄생됐다. 태화관에서 창립총회가 열렸다. 창립취지서의 내용은 이랬다.
‘조선에서 소비하는 면포는 수입품에 의존하고 있어 이의 자급을 기도함은 조선경제독립상 급무라고 할 것이다. 우리들은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조선공업의 발달을 도모함과 함께 다수의 조선인에게 직업을 주고 공업적 훈련을 하려고 본사창립의 허가신청서를 제출하는 바이다.’
창립취지서가 아니라 조선경제독립선언서였다. 그게 경성방직의 출발이었다. 경주 최부자와 고창의 김갑부는 그 후 공동발기인이 되어 동아일보도 설립했다. 경주 최부자는 대구에서 대학을 설립하고 고창 김갑부는 중앙학교와 고려대학을 만들어 민족의 인재들을 키웠다. 봉건왕조를 연상시키는 롯데그룹의 오너가가 보통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한국인 신 씨이자 일본인 시게미쓰가 라고도 전해진다. 기업 자체도 한국인 기업인지 외국인의 투자기업인지 잘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일본의 비상장 회사들이 한국 내 계열사들을 지배하는 구조라고 한다. 돈이 있다고 다 부자가 아니다. 부자가 부자다워야 천민자본주의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 롯데 재벌가의 사람들이 작아지고 작아져 예수가 말한 바늘구멍을 통과했으면 좋겠다.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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