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구’ 찾았는데 포탄이 웬 말이냐
‘한반도 신 경제지도’ 구상을 밝힌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19일 현대아산을 방문해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해 필요한 조치에 관해 논의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연타였다. 그는 선거구제 개편을 위한 빅딜이 별반 성과를 내지 못하자, 박근혜 정부의 약한 고리인 대북정책을 정면 공격하면서 선제 대응에 나섰다. 경제통일을 핵심으로 하는 ‘한반도 신 경제지도’ 구상이 그것이다. 실제 그랬다. 문재인 대표는 폭염정국 초반인 지난 5일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와 ‘권역별 비례대표제’의 빅딜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87년 체제의 한계인 3김 지역주의를 극복하자며 소선거구제 개편의 당위성을 던졌다. 의미는 컸다. ‘승자 독식주의’인 거대 양당 체제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명분(지역주의 극복)은 있지만, 실익이 없었다는 점이다. 당 전선은 이내 흐트러졌다. 당내 비노계를 중심으로 “비례대표제나 폐지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문재인-이종걸’ 투톱 체제의 균열은 더욱 심화됐다.
역습도 당했다. 김 대표가 즉각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새누리당 내부는 화력을 총동원해 문 대표의 승부수를 ‘의원정수 확대’로 몰아붙였다. 새누리당의 완승이었다. ‘국민에게 공천권을(오픈프라이머리)’이란 슬로건은 사라졌다. ‘지역주의 극복(권역별 비례대표제)’도 간데없이 의원정수 확대만이 남았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권역별 비례대표’는 무늬만 정치 혁신이지, 의원정수 확대의 또 다른 이름”이라며 “이것이야말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꼼수”라고 꼬집었다.
새정치연합 내부에서도 ‘전략적 실패’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김 대표가 총선 룰 전쟁에서 한 발 치고 나가자 내부 위기감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현 정치국면에서 문 대표의 포지션은 어정쩡하다. 반면 보수진영에선 김 대표가 건재하다. 김 대표는 차기 대권의 최대 경쟁자다. 그가 야권 이슈인 오픈프라이머리를 쥐고 여의도 판을 흔들었다. 차기 총선 경쟁의 핵심 변수인 ‘공천 혁신’ 이슈를 선점한 셈이다. 진보진영에선 천정배발 야권신당이 버티고 있다. 당 내부에선 비노계인 안철수 전 공동대표를 시작으로, 경쟁자들이 친노계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빅딜’ 제안이 나왔다. 한 평론가는 “당내 계파 갈등과 호남발 신당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선 돌리기’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인물과 구도 전선에서 확고한 입지를 형성한 김 대표의 존재로 문 대표의 선명성이 흐려지자, ‘김무성 공격’을 통해 존재감 확보에 나섰다는 얘기다. 외부로 확장하는 원심력을 꺾고 친노계에 대한 구심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행보라는 분석이다. 새정치연합 한 관계자는 “오픈프라이머리와 권역별 비례대표제 빅딜 제안을 통해 선거구제 개편의 공을 김 대표에게 던졌지만, 부메랑으로 돌변해 날아온 꼴”이라고 말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의원정수 확대(369명)를 주장한 김상곤 새정치연합 혁신위원장이 “핵심은 의원정수 확대가 아닌 권역별 비례대표제”라고 주장했지만, 여론을 뒤엎지는 못했다. 그만큼 의원정수 확대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크다. 디테일의 싸움에서 패한 친노계의 판단 미스로 선거구제 개편은 ‘기득권 지키기’로 치환됐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다.
여기에 국회의장 직속 선거제도개혁 국민자문위원회의 선거구제 개편 권고안은 친노계 내부의 동력을 완전히 꺾었다. 자문위는 10일 야권이 주장하는 연동형인 ‘독일식’이 아닌 일본식인 권역별 ‘병립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권고했다. 이는 의원 정수와 지역구·비례 의석 비율을 현행(246 대 54)대로 유지하되, 전국을 6개 권역(서울, 인천·경기·강원, 부산·울산·경남, 대구·경북, 광주·전북·전남·제주)으로 나눠 권역별 정당득표율에 따라 비례의석을 할당하는 제도다. 의원정수 유지와 소선거구제 폐지를 모두 담은 절충안이다.
정의화 의장이 “양당제를 고착할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야권 내부에선 “대권을 바라보는 정 의장의 의중이 담긴 게 아니냐”는 불만도 터져 나왔다. 지난해 세월호 특별법 협상 등 정치적 변곡점마다 ‘여야 합의의 정치’를 꾀한 정 의장의 또 다른 작품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이후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지난 18일 공직선거법심사소위원회에서 20대 총선 국회의원 정수를 300명으로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선거제도 개편 3대 쟁점인 △권역별 비례대표제 △오픈프라이머리 △선거구획정 등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총선 룰 1라운드는 문 대표의 패배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친노 내부에선 미묘한 기류의 변화가 감지됐다. 차기 대권의 열세임을 인정하고 문 대표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전략으로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통상적으로 대세론을 탄 대권주자는 자신의 보완재 찾기 전략에 나선다. 2012년 대선 당시 생애주기별 복지 등으로 경제민주화 행보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전략이 대표적인 예다. 범야권 지지층으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도시개발 등 중도 보수층 공략에 나서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문 대표의 사정은 다르다. 여론조사전문기관 ‘한국갤럽’의 8월 둘째 주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조사(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에 따르면 문 대표는 12%로, 박 시장(16%)과 김 대표(15%)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문 대표는 야권 텃밭인 광주·전남에선 18%였다. 박 시장(35%)의 절반에 그친 셈이다. 대선의 변수인 수도권과 40대, 화이트칼라에서도 11%·12%·13%로 박 시장(16%·15%·23%)에게 밀렸다. 김 대표는 이 계층에서 14%·14%·10%를 기록했다. 문 대표는 새정치연합 지지층에서도 26%로, 29%를 기록한 박 시장에게 뒤처졌다. 지금은 보완재를 찾을 때가 아니라 범야권 지지층을 결집해야 하는 시기라는 얘기다. 문 대표가 지난 10일과 12일 전북과 전남 지역 의원들과 잇따라 회동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선 경제통일’ 방안이다. 문 대표는 16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남북 경제공동체를 ‘5만 달러’ 시대로 가기 위한 전초기지”라며 △6자 회담 개최를 위한 남·북 간, 북·미 간 ‘2+2’ 회담 제안 △여야 대표 공동으로 5·24 조치 해제 요구 등을 촉구했다. 문 대표와 사사건건 대립한 박지원 의원은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비노계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물론, 친노계와 비노계의 갈등의 뿌리인 대북송금 특검을 겨냥한 게 아니냐”고 말했다. 남북경협을 고리로 계파 갈등을 봉합하고, 그 동력으로 정국을 박 대통령과의 ‘일대일’ 구도를 만들려는 전략적 포석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대북송금 문제는 DJ(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남북 정상회담의 대가로 북한에 5억 달러를 건넸다는 의혹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특검 문제가 발발하자, 동교동계는 노 대통령을 향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은 배신행위”라고 맹비난한 바 있다. 문 대표의 ‘한반도 신경제지도’ 승부수에는 외부적으로 존재감 확보, 내부적으로 계파 갈등 해소의 시그널이 담겼다는 의미다. 대북정책 승부수에 ‘문재인의 운명’이 달린 셈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포탄정국’에 날아갈 판이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