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청 인지하고도 2년간 묻어둬
금품수수 혐의를 받은 박근혜 대통령의 이종사촌 형부인 윤 아무개 씨가 8월 19일 오전 경기 의정부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 윤○○은 대통령님을 빙자하여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으며, 저 말고도 여러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다시는 저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방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2013년 7월, 당시 통영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황 씨는 이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작성했다. 황 씨는 경남 통영의 한 아파트 인·허가 과정에서 공무원에 뇌물을 건넨 혐의 등으로 막 수감된 상태였다. 황 씨가 관여한 통영 아파트 비리 사건은 지난 2008년 7월 발생했는데, 당시 공무원·공인회계사·경찰간부·도의원·대학교수·기자 등 사회 지도층이 다수 개입된 것이 드러나 화제가 됐다.
황 씨는 해당 사건으로 지난 2008년부터 수배령이 떨어져 오랜 기간 도피 생활을 해왔다. 긴 도피 생활에 지친 그는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제18대 대선이 끝난 직후인 2013년 1월경에 한 지인의 주선으로 윤 씨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윤 씨는 자신을 ‘상록포럼’ 공동대표이자 ‘충청향우회 중앙회 부총재’라고 소개하며 명함을 건넸다.
황 씨가 쓴 진정서에 따르면, 윤 씨는 첫 만남에서 “이번 대선 때 충청도에서 표가 많이 나오는데 자기가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대통령 친·인척 가운데 가장 공헌자”라며 대선 유세 당시 찍은 사진 몇 장을 자랑삼아 꺼내 보였다고 한다. 황 씨는 첫 만남 이틀 뒤, 다시 윤 씨와 만나 현금 3000만 원을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아 전달했다.
이후 황 씨는 두 차례에 걸쳐 윤 씨에게 현금 2000만 원을 더 건넸다. 그 무렵 두 사람은 황 씨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자주 만났는데, 그때마다 윤 씨는 자신의 정치적 배경을 과시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물론 현직 장관 및 청와대 비서관의 실명을 거론하며 “잘 아는 사이”라며 이들을 통해 황 씨 사건을 해결해 주겠다고 공언했다는 것이다.
황 씨는 윤 씨의 지시에 따라 한 법무법인과 계약을 맺고 사건 수임을 맡겼다. “이 법무법인 변호사와 계약해야만 위에서 일하는 것이 노출되지 않는다”는 윤 씨의 설명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2013년 5월 28일, 황 씨는 윤 씨와 해당 법무법인 변호사 등과 함께 통영지청에 자진출두했다가 그날 바로 구속되고 말았다.
하지만 윤 씨는 이 같은 황 씨의 주장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윤 씨는 검찰 수사 과정에서 “나는 황 씨에게 한 푼도 받지 않았을뿐더러 황 씨를 빼 주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라며 “내가 대통령 친·인척이기 때문에 무고하는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하지만 황 씨는 자신이 구속된 이후에도 윤 씨가 “중간에 일하는 사람에게 돈을 보내주어야 한다”며 300만 원을 더 요구하는 등 총 5300만 원의 금품을 수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윤 씨는 도주 및 증거인멸을 이유로 지난 19일 밤 구속 수감됐다. 가장 큰 의문점은 검찰이 황 씨가 구속된 지 2년이 지나서야 윤 씨에 구속영장을 청구하며 수사를 재개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검찰은 황 씨가 수감된 2013년 5월 직후부터 윤 씨의 범죄 혐의를 인지하고 있었다. 윤 씨는 황 씨와 함께 통영지청을 찾았을 당시 자신이 대통령 친·인척임을 당당하게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윤 씨는 단순히 대통령 사촌형부가 아닌 지난 11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인물이기도 하다.
윤 아무개 씨에게 금품을 전달했다고 주장한 황 씨가 작성한 진정서와 검찰이 황 씨의 컨테이너에서 발견한 청와대 비서관 이름이 적힌 봉투.
뿐만 아니라 대통령 친·인척 관련 사안은 통상 청와대로 곧바로 보고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청와대 민정수석실 역시 검찰과 비슷한 시기에 윤 씨의 범죄 혐의를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2013년 도입한 특별감찰관제에 따르면, 대통령의 사촌형부인 윤 씨 역시 감찰 대상에 포함되고, 모든 사항은 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규정돼 있다.
2년 만에 수사를 재개한 검찰은 지난 7월 황 씨의 컨테이너를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유력 비서관 이름이 적힌 서류봉투를 발견하기도 했다. 황 씨가 봉투 겉면에 자필로 ‘윤○○, 청와대 A 비서관에 부탁해 처리해 준다며 5천만원 수수’라고 적어놓은 것이다. 윤 씨와 A 비서관은 박근혜 후보의 외곽단체인 상록포럼에서 함께 활동한 만큼 면밀한 조사가 필요한 사안이다.
공교롭게도 A 비서관은 2013년 8월경에 경질돼 청와대에서 나왔다. 당시 알려진 바로는 경색국면인 당청 관계 및 대야 관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다. 현재 한 공공기관 이사장으로 있는 A 전 비서관은 “윤 씨를 잘 알지만 단 한 번도 청탁을 받은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해당 사건을 공론화시킨 김경협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사건을 보고받은 청와대가 대통령 형부 개입 부분을 덮으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검찰이 2년이 지나 영장을 청구한 이유가 청와대의 은폐지시에 의한 것은 아닌지, 청와대 등 인사가 직접 연루된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을 풀려면 청와대가 전면에 나서서 이 사건을 조사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검찰 사정에 밝은 한 여권 관계자는 “황 씨 역시 본인이 전직 총리의 딸이라며 거짓말로 사기 행각을 벌이고 수년간 도피 생활까지 했던 사실이 있다. 황 씨의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따져볼 문제”라면서 “윤 씨가 단순 친분 관계 이상을 과시한 것 이상의 구체적인 물증이 잡힌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