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쳐놓은 덫에 장성택 제대로 걸렸다
지재룡 주중 북한 대사. 연합뉴스
공교롭게도 이 불똥이 북한으로도 튀었다. 그동안 통치자금을 명목으로 스위스 비밀계좌에 묶어놨던 비자금 56억 달러가 스위스의 일부 계좌 공개 조치에 따라 들통 날 위기에 처했던 것. 이때 북한 외무상 리수영이 직접 나섰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리수영은 유럽에 머물며 비자금 분산 작업에 매진했다. 이 시기, 리수영의 ‘작업’에 따라 북한의 비자금은 크게 세 곳으로 분산된다. 첫째는 핀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북·서 유럽지역으로, 둘째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의 전통적인 친북 국가로, 마지막 세 번째는 마카오, 홍콩, 중국(상하이와 항저우를 중심으로) 등 중화권 국가로 나눠놨다. 물론 이외에도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같은 북한이 중시했던 국가에도 비자금이 일부 있었지만 아주 미미했다. 이때, 중국으로 들어온 비자금만 17억 달러에 달했다. 북한 1인 독재체제 유지에 밑천이 될 만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그리고 이 시기, 장성택과 김정은 사이에서 악연의 불씨가 살며시 싹트기 시작했다. 2010년 9월 제3차 당 대표자회의가 있었다. 당 대표자회의는 조선로동당의 의사결정 공식기구 중 당 대회 다음으로 큰 규모와 권위를 갖는다. 당시 9월 당 대표자회의에선 김정은이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및 당 중앙위원으로 임명되며 후계자로 공식적인 천명을 받았다. 북한의 3대 후계 세습과 더불어 김정은의 공식무대 데뷔라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를 앞두고 김정일은 가족회의를 소집한다. 애초 김정일은 9월 당 대표자회의에서 아들 정은에게 ‘당 조직비서’ 자리를 넘겨주려고 했다. 사실상 당의 전권을 위임하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가족회의에서 김경희-장성택 부부가 반대표를 던졌다. 아직 어린 정은에게 큰 권력을 주면, 자칫 당과 군 내부에서 볼멘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실제 군 노장파들 사이에선 비공식적으로 반대할 것이 확실했다. 일부는 장성택 개인 차원에서 경계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김정은은 무척 섭섭했다. 본인 역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마음이 급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고모와 고모부가 갑작스레 자신의 후계세습 속도전에 브레이크를 건 셈이다. 내심 ‘흑심’을 품고 있는 장성택에 대해 악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 시기, 정은은 장성택이라는 ‘장애물’을 제대로 실감했을지도 모른다.
9월 당 대표자회를 통해 삼남 정은을 후계자로 공식천명한 김정일은 이듬해 12월 17일, 심근경색과 쇼크로 인해 급사했다. 자강도에 소재한 희천발전소 현지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객사한 것이다. 김정일의 사망 직전까지 김정일과 김정은 사이에는 이미 장성택의 후처리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견해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물론 김정일 본인과 그 주변은 지난 2008년 뇌졸중으로 사경을 해맨 이후 죽음을 대비해 왔다. 어찌 보면 갑작스러운 저승길은 아니었다.
이 때만 해도 우리 정부를 포함해 전문가들 대부분은 북한의 실권자로 후계자 정은이 아닌 장성택을 지목했다. 김정일의 장례식 당시 장성택은 ‘대장’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고 등장해 이러한 설을 입증하는 듯했다. 북한의 각종 공식행사에서도 그는 자신감 있는 행보로 주변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김정일의 유훈으로 이어지는 장성택에 대한 견제 프로세스는 아주 은밀하게 정은에게로 이어졌다. 겉보기엔 화려한 장성택의 뒷면에는 계속해서 이러한 프로세스가 옥죄어오고 있었다. 2012년 7월에 있었던 리영호 당시 총참모장의 숙청은 정은이 처음 장성택에게 들이민 경고장이었다.
김정일이 죽기 전 기존의 오극렬의 힘을 빼면서 군부를 견제했다면, 장성택도 군 내부 세력화가 필요했다. 장성택의 두 형은 김정일의 선군정치시대 군의 주요 간부였지만, 이미 김정일의 견제작업에 의해 제거된 상황이었다. 장성택은 그 대안으로 군의 실세 중 한 명인 리영호에 주목했고, 실제 그에게 선을 대려는 시도를 했다.
이를 감지한 김정은은 눈 뜨고 당할 수 없었다. 그는 김설송(김정일이 실제로 총애한 딸), 최영림, 최룡해 등 로열패밀리 및 노장파, ‘북한판 태자당’의 협조 하에 주변의 힘을 모아 즉각적인 제거에 나섰다. 그리하여 단숨에 리영호의 숙청을 단행했다. 여러 가지 군 관련 이유를 댔지만, 결국 목적은 장성택이 군에 선을 대기 전 이를 차단하는 것과 함께 권력의 실제 파워가 나오는 군을 휘어 잡아야만 했다. 오극렬만큼 아버지 김정일이 아꼈던 리영호였고 김정은에게도 이미 군 관련 핵심 참모였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 김정은에게 문제가 생겼다. 앞서의 비자금 문제가 2012년 이후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한 것. 문제의 핵심은 17억 달러의 비자금을 쥐고 있는 중국이 북한의 이 비자금 인출을 사실상 동결한 까닭에서다.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중국의 대북관계 기조는 이미 변화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2012년 4월 미국의 2·29 합의를 깨고,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거리미사일(위성로켓)을 발사했다.
더 이상 자신들의 앞마당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안보 문제에서 제멋대로인 북한의 행동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것. 국제적으로 불안한 정치 및 경제 안보상 불똥이 자칫 중국에 튈지 몰랐다. 내심 중국은 북한 김정은이 자신과 같은 개혁·개방 경제모델로 변화하길 바랐다. 더 이상의 어리석은 어린애 같은 김정은의 응석을 받아줄 수 없었다. 이미 이 시기부터 중국 내부에서도 새롭게 들어선 시진핑 정부는 자국의 이익관계가 중요하므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도 그 이유였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2012년 4월, 북한의 미사일 실험에 반대의사를 표명했지만 이때도 북한은 이를 무시하고 실험을 강행했다. 중국 최고지도부는 자신의 곳간으로 들어온 북한의 비자금 17억 달러를 요긴하게 이용하기 시작한다.
장성택의 최측근이었던 지재룡 주중 대사가 중국 정부와 장성택 간의 은밀한 대화를 김정은에게 보고했다. 2012년 8월 17일 당시 북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큰 사진 왼쪽)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후진타오 국가주석(큰 사진 오른쪽)을 면담했다. 연합뉴스
2012년 8월, 장성택은 대표단 50명을 이끌고 중국으로 향한다. 겉으로 드러난 명목은 북-중 국경 경협문제였지만, 진짜 목적은 중국에 김정일이 남긴 비자금 17억 달러를 풀어달라는 것. 김정은 입장에서 이는 불안한 북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중의 핵심 문제였다. 집권 초기 민심을 달래야 할 당근이 절실히 필요했다. 중국 내 각종 사업을 주무르고 있는 장성택에게 특명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장성택은 중국이 키를 쥐고 있는 북한의 비자금 동결을 풀지 못했다. 이때 중국은 그에게 무서운 제안을 한다.
‘우리는 북한이 중국의 모델을 따라 개혁·개방에 나서길 바란다. 여기에 당신이 나서서 힘을 써 달라.’
이는 곧 김정은 체제가 상징적 의미만 갖고 실질적으로는 종식되는 동시에 장성택의 실권 장악을 뜻했다. 조카 정은의 뒤에 실권자로 자리하고 싶은 장성택의 심산과 중국의 계산이 잘 맞아 떨어졌다. 장성택에겐 독배였던 셈. 이때 장성택은 계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김정일이 죽기 전, 미리 쳐 놓은 ‘덫’이 이때부터 결정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장성택의 최측근이었던 지재룡 주중 대사가 이러한 중국의 제안과 장성택의 심산을 정은에게 은밀히 보고했다.
중국과 장성택 사이에 오간 은밀한 대화가 지재룡에 의해 정은의 귀에 들어간 것은 2012년 말부터 2013년 초 사이의 일이다. 물론 장성택은 이때만 해도 지재룡이라는 덫에 대해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언제나처럼 자신이 가장 믿는 심복이었을 뿐. 이것이 사실상 장성택 처형의 결정적인 계기였다. 지재룡의 보고를 들은 정은과 설송의 마음은 이러했을 것이다.
‘장성택은 더 이상 봐줄 수 없다. 제거해야 할 이유가 확실해졌다. 아니면 내가 위험하다. 어차피 중국 내 비자금도 장성택을 통해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진짜 실행에 옮긴다.’
2009년 6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 노동당 부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김 위원장의 함주군 동봉협동농장 현지지도에 동행해 함께 찍은 기념사진. 연합뉴스
장성택은 또 한 가지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2013년 1월, 그의 아내이자 중앙당 조직지도부 담당 비서 겸 조직지도부 부장으로서 실질적 제2인자인 김경희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2013년 4월 당시 북한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경희의 몸무게는 39㎏에 불과했다고 한다. 급격한 시력저하, 신경성 방광염, 당뇨합병증, 우심실 동맥경화 악화, 심전도 이상, 약간의 뇌졸중 증상 등 총체적인 문제로 병상에 누웠다. 입원 초기 7~10일 사이엔 의식이 없었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럼에도 장성택은 단 한 번도 아내 김경희를 찾지 않았다. 되레 그는 이 엄중한 시기, 7명의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환락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장성택의 부적절한 처신은 당 조직지도부 인사에 의해 김경희에게 그대로 보고된다. 물론 이전부터 여색에 일가견이 있었던 남편 장성택의 습성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병상에 누워있었던 시기였다.
부부가 등을 돌리면 남이 아니다. 남보다 훨씬 무서운 적이 된다. 김경희는 남편의 이러한 행동을 두고 섭섭함을 넘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과거부터 현재까지 자신들의 핵심 권력을 휘젓고 있는 장성택에 대해 앙심을 갖고 있는 조직지도부의 모략적인 대 장성택 세력 제거 의사에 김경희가 동조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2013년 2월의 일이다.
반면 장성택에게 있어서 아내 김경희는 이제 마지막 남은 안전장치였다. 지난 1978년과 2004년 두 차례 숙청의 위기 속에서도 결국 그를 다시 당직에 복귀하도록 힘써줬던 것은 아내 김경희를 사랑한 오라비 김정일의 인내였다. 언제나 그가 지방으로 쫓겨날 때마다 아버지와 오빠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고 매달렸다. 남편을 다시 평양으로 데려와 달라고. 그때마다 공주님의 애원에 아버지와 오빠는 어쩔 수 없이 ‘못난 놈’ 장성택을 다시 중앙무대로 복귀시켰다.
김정일과 삼남 정은에게 있어서 장성택 제거의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 아닌 김경희였다. 장성택이 제거의 대상으로 보고되어도 김경희에 대한 설득이 최우선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여동생, 그리고 고모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장성택의 마지막 안전장치가 본인의 결정적인 실수로 인해 덜컥 풀려버렸다. 장성택은 아마도 이 시기부터 자신 곁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조금씩 눈치 채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목숨까지 가져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하지만 너무나 안일했고, 자신의 당시 안정적인 무소불위의 권력에 단단히 취해있었다. 아내 김경희의 마음에 더 이상 남편 장성택은 없었다. 조카 정은의 은밀한 제거 계획에 김경희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협조했던 것이 확실하다.
이 시기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2013년 2월 북한은 주변국들은 물론 혈맹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3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핵실험은 일정한 수준에서 성공했지만, 이는 중국 정부의 심장을 제대로 갈긴 꼴이 됐다. 중국도 서서히 장성택을 옥죄는 김정은의 계략을 눈치 채기 시작한다. 북한 내 친중 세력가로 본국의 ‘원대한’ 뜻을 이뤄줄 장성택 카드가 제거될 경우 중국 정부 역시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중국 역시 장성택을 구하기 위한 나름의 방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김경희의 동의를 얻은 김정은은 이제 본격적으로 장성택의 제거 작전에 돌입했다. 그 작전의 시작점은 ‘돈줄’이었다.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필자 이윤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