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신하균 되려 고민 꽤 했지요, 허허…
▲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천상운집(千祥雲集)’ 지면에 담기 위해 사인을 부탁하자 난처해하던 변희봉은 이런 멋진 글귀를 남겼다. ‘좋은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라’는 풀이와 함께. 난처해하는 그의 표정엔 데뷔 이래 40여 년 동안 단조연으로 활동하다 비로소 주연의 자리에 올라선 노배우의 겸손이 묻어 있었고 그가 남긴 글귀엔 전성기를 구가하는 요즘 그의 근황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에는 정상에 오르기까지 40여 년에 이르는 한 인간의 인생사가 녹아 있었다.
김태진(김): 영화 <더 게임>의 개봉이 얼마 안 남았는데 설레기도 하고 기대도 되고 마음이 복잡하실 것 같아요. 어떠세요, 요즘 심경이.
변희봉(변): 두렵습니다. 이번엔 제 살 깎아먹는다고 할까요, 우리 영화 네 편이 같이 붙어 정말 큰일났구나하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섭니다. 정말 잘 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김: 솔직한 심정이시네요. 영화를 보니까 20대의 민희도를 연기하려면 준비해야할 부분이 많았을 텐데…. 표정부터 말투 하나까지 말이죠.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연습하셨나요?
(영화 <더 게임>은 가난한 거리의 화가 민희도와 금융계의 큰 손 강노식의 비밀스런 내기를 그린 영화다. 내기에 진 민희도는 뇌수술을 통해 강노식에게 젊은 몸을 빼앗긴 채 강노식의 몸으로 살아간다.)
변: 배우는 책을 처음 읽을 때가 가장 중요한 데 <더 게임> 책을 처음 읽고 힘찬 강노식 캐릭터를 처음 보면서 이거는 정말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무릎을 쳤어요. 그런데 며칠 뒤 감독을 만나니까 내가 책을 잘못 읽었다는 거예요. 강노식이 뇌수술을 받은 다음에는 민희도로 바뀐다는 내용이었죠. 집에 와서 다시 책을 보니까 아! 이건 아주 청천벽력이더라고요. 그래서 신하균이 나온 영화부터 여러 가지를 가져다 보며 생각해봤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감독에게 얘기를 했죠. 그런데 감독은 그걸 하나도 어렵지 않게 생각하더라고요. 고민 끝에 변화를 주려면 큰 변화를 줘야 보는 사람에게 끌림을 당하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마음을 굳혔어요. 감독과 촬영하는 내내 많은 토론을 벌였던 게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네요.
김: 신하균이 민희도에서 강노식으로 바뀌어 연기할 때, 그걸 바라보는 마음이 어떠셨어요?
변: 강노식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의도, 목소리에 변희봉 색깔이라도 조금 입혀보려는 의도를 그야말로 최대한 자제하는 신하균이 굉장히 돋보였어요. 내 흉내나 내려고 그랬다면 그저 그런 연기가 됐을 거예요. 주어진 캐릭터에 진실되게 접근하려는 자세가 돋보였는데 내가 나름 선배라면 선배지만 그 부분에선 신하균에게 배울 부분이 있었어요.
김: 기자시사회에서 이혜영이 ‘이렇게 편집당할 줄은 몰랐다’고 얘기해 화제가 됐는데 노력한 부분이 편집되면 기분이 좋진 않을 것 같아요.
변: 배우는 그게 생명입니다. 생명이 재단되고 나면 참 괴롭죠. 배우로서 정말 공감되는 부분이지만 영화를 위해 그렇게 된 것인 만큼 어쩔 수 없이 이해해야 하겠죠.
김: 영화 제목이 <더 게임>인데 평소에도 게임이나 내기를 재미삼아 하시나요?
변: 젊어서야 화투나 포커 한두 판 안 해 본 사람이 누가 있겠소. 나도 젊어선 해봤지만 이제 그럴 나이는 지났지. 그보단 인생이라는 게 다 ‘게임’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김: 선생님은 정말 많은 역할을 하셨는데 점쟁이, 이방, 사이비 교주 등 엄청나게 많은 직업의 캐릭터를 소화하셨거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 가장 힘들었던 캐릭터는 무엇이었나요?
변: 한 20년 쯤 전일까. 드라마 <안국동 아씨>를 할 때 당상복자(점쟁이) 역할을 한 적이 있었어요.
▲ 영화 <더 게임>에서 서로 간 뇌수술을 통해 의식이 바뀌는 역할을 맡은 변희봉과 신하균. | ||
변: 드라마가 중단된 게 아니라 내가 중간에 없어졌죠. 그 당시 내 역할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는데 드라마에서 내가 경을 한 번 읽으면 학생들이 그렇게 흉내를 냈어요. 결국 학생들 교육에 안 좋다며 정부에서 드라마를 없애라는 지시가 내려와 결국 나만 빠지고 드라마는 끝까지 갔죠.
김: 데뷔는 배우가 아닌 성우로 하셨어요. 1966년 MBC 공채 성우 2기로 데뷔해 70년대 초에 배우로 변신하셨네요.
변: 성우를 하고 있을 때 TV가 생긴다는 말은 있었어요. 배우가 되려면 우선 연극부터 해야 할 것 같아 극단 산하에서 연기를 시작해 70년대 초 TV가 생기면서 탤런트로 데뷔했죠.
김: 그 이후 참 오랜 기간 단조연 배우로 활동하셨어요.
변: 처음부터 주연을 하는 톱스타가 있는가하면 단조연을 하며 각고 끝에 커 나온 배우도 있는데 난 시련 끝에 나온 배우가 연기의 참 맛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김: 선생님의 가족 얘기를 좀 듣고 싶어요. 따님들도 굉장히 좋아할 것 같아요.
변: 셋 다 출가했습니다. 아빠가 후에라도 이렇게 풀리니까 자기들 마음이 얼마나 좋겠어요. 이제 조금 보태줄 수 있는 형편이 되면 좋겠는데 아직은 그러지 못하니까 조금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