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출발이 좋았다. 분명 재미없는 영화일 것이라 나름 확신(?)하고 보기 시작한 영화는 꽤 매력적으로 시작됐다. 월소(전도연 분)가 홍이(김고은 분)에게 ‘풍진삼협의 비극’을 들려주기까지의 초반부 30여 분은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흡입력이 있었다. 이렇게 재밌는 영화가 왜 흥행에 실패하고 낮은 평가를 받은 것일까. 이후 영화를 보는 내내 불안감이 지속됐다. 어느 포인트부터 영화가 재미없어지는 것일까. 문제는 바로 영화가 준비한 비장의 반전이었다.
먼저 ‘풍진삼협의 비극’ 부터 살펴보자. 홍이는 어린 시절부터 월소에게 검을 배웠다. 그가 검을 배운 이유는 스무 살이 되면 아버지(풍천)와 어머니를 죽인 두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정확한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철없는 홍이가 자신의 무예를 뽐내기 위해 저잣거리에 나갔다가 우연히 ‘유백’(이병헌 분)을 만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월소는 홍이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결심한다. 바로 18년 전 ‘풍진삼협의 비극’을.
칼이 세상을 지배하던 고려 무신시대에 상주 민란이 벌어진다. 이를 주도한 것은 풍천(배수빈 분)과 덕기, 그리고 설랑이다. 풍진삼협이라 불리는 이들은 같은 스승(이경영 분)의 제자들로 한날한시에 죽기로 맹세한 형제이자 동지였다. 또한 덕기와 설랑은 연인이다. 백성들과 함께 한 전투에서 풍천은 이의명(문성근 분)의 아들 존복(김태우 분)을 사로잡는다. 이의명은 당대 최고의 권력가다.
이의명을 찾아간 풍진삼협은 백성들의 요구사항을 전하지만 이의명은 그저 비웃을 뿐이다. 이미 풍천의 아내와 어린 딸을 붙잡아 놓은 이의명은 이들을 인질로 내세운다. 그렇지만 풍천은 아내와 딸의 희생을 무릅쓰고 덕기에게 존복을 베라고 명한다. 그렇지만 덕기는 존복을 베는 대신 그를 풀어준다. 이미 이의명의 제안을 받아들인 덕기는 풍천에게 함께 이의명에게 투항해 더 큰 뜻을 이루자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풍천은 “백성들과 함께 한 뜻보다 더 큰 뜻은 없다”며 덕기의 배신을 꾸짖으며 덕기에게 칼을 겨눈다. 분노에 찬 풍천의 검으로 인해 덕기는 목숨을 잃을 위기에 몰리지만 덕기의 연인 설랑이 뒤에서 풍천을 벤다. 부와 명예를 위해 풍천을 배신한 덕기, 연인인 덕기를 살리기 위해 풍천을 배신한 설랑으로 인해 이날 많은 백성들이 희생된다. 게다가 덕기는 풍천의 아내와 딸까지 칼로 벤다.
설랑은 힘겹게 죽기 직전의 풍천의 딸을 구해 살려 내는 데 그가 바로 홍이다. 홍이를 살리기 위해 설랑은 맹인이 되는 고통까지 감내한다. 결국 홍이의 두 원수는 바로 덕기와 설랑인데, 덕기가 바로 유백이며 설랑이 월소다. 부모를 모두 잃고 어미처럼 믿고 의지했던 월소가 원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홍이는 이런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본래 ‘풍천의 검’은 뜻을 세우고 ‘설랑의 검’은 불의에 맞서며 ‘덕기의 검’은 소중한 것을 지켜 뜻을 완성하는 검이다. 그렇지만 덕기와 설랑의 배신으로 그 검들은 본래의 의미를 잃었다. 풍천의 검이 뜻을 세웠으나 덕기의 검이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했으며 설랑의 검도 불의에 맞서지 못했다. 결국 풍진삼협의 비극이 바로 칼의 기억이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이젠 복수의 날들이 펼쳐져야 한다. 복수를 그린 영화의 뻔한 공식대로 가자면 홍이는 충격을 딛고 일어나 무예를 갈고 닦아야 한다. 아무래도 이 과정에선 최고의 고수를 스승으로 만나야 하는데 그 역할로는 풍진삼협의 스승이 적합해 보인다. 절치부심하고 무예를 갈고 닦아 원수를 갚아야 한다. 그런데 영화 <협녀>는 이런 뻔한 공식을 거부한다.
영화 <협녀>에는 ‘비장의 반전’이 숨겨져 있다. 월소, 그러니까 설랑이 홍이에게 들려준 풍진삼협의 비극 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비밀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인 반전이다. 본디 반전이란 충격적이어야 하는데 <협녀>의 반전은 충격을 떠나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 내용을 자세히 언급하며 왜 납득이 가지 않는지 얘기하고 싶지만 그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제하겠다.
영화에서 반전은 확실히 매력적인 카드다. 그렇지만 이런 반전은 관객이 확실히 이해하고 납득을 해야 된다. 납득이 가지 않아 이해할 수 없는 반전은 충격이 아닌 황당함을 유발한다. 바로 이 영화의 반전이 그렇다. 분명 초반부 ‘풍진삼협의 비극’은 좋은 이야기 설정이었다. 따라서 그냥 이를 기반으로 평범한 복수극이었다면 ‘그저 그런 B급 영화’라니 ‘뻔한 복수극의 공식을 답습한 영화’라는 등의 비판을 들었을 지라도 재미는 있었을 것이다. 이리 황당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 영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5년 동안 코마상태이던 ‘더 브라이드’(우마 서먼 분)이 빌에게 복수하는 영화 <킬빌>은 복수 자체에만 집중한 영화지만 쿠엔틴 타린티노의 이 영화를 B급 영화라 얘기하는 이는 있을 지라도, 재미있는 영화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협녀>는 B급 복수 영화가 되지 않기 위해 황당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게다가 캐릭터 설정도 매우 잘못됐다. 우선 유백, 그러니까 덕기는 악역이다. 철저히 악역이어야 할 유백의 캐릭터는 매우 모호하다. 형제와 같던 동료를 배반한 것으로 시작해 왕의 자리까지 탐내는 그의 행적은 분명 최고의 악인인데 영화는 유백의 다양한 내면을 보여주는 데 더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캐릭터가 꼬여 버렸다. 복수극에서의 악역은 관객이 함께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이 돼야 한다. 그래야 복수가 이뤄지는 순간 관객들이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협녀>의 유백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월소, 그러니까 설랑은 더하다. 납득이 가지 않는 반전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월소는 그 자체로 납득이 가지 않는 캐릭터다. 영화 후반부에서 유백을 만난 설랑은 “네가 내가 사랑한 덕기를 죽였다”고 말한다. 이 대사가 꼬여버린 캐릭터의 원인이 아닌가 싶다. 유백을 죽도록 싫어하는 월소 안에는 덕기를 여전히 사랑하는 설랑이 공존하며 유백 안에도 여전히 설랑을 사랑하는 덕기가 공존한다는 게 박흥식 감독이 설정한 캐릭터인 것 같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유백도 덕기도 아닌 캐릭터와 월소도 설랑도 아닌 캐릭터가 모호하게 영화를 채우고 있다. 그러다 보니 끝까지 주요 캐릭터가 제대로 된 생명력을 얻지 못한 채 감정만 과잉되고 말았다.
가장 이해가 힘든 캐릭터는 홍이다. 영화 초반부에 ‘풍진삼협의 비극’을 듣고 홍이는 엄청난 충격에 빠진다. 어미처럼 믿고 의지한 월소가 원수라는 게 얼마나 충격이었겠는가. 그런데 이번엔 납득하기 힘든 반전이 홍이에게 전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납득하기 힘든 반전은 홍이를 둘러싼 내용으로 홍이 입장에선 월소가 원수라는 얘기보다 더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그런데 홍이는 금세 그 충격을 극복한다. 아니 적어도 홍이는 그 반전을 스스로 납득한다. 그리고 흔들림 없이 복수를 향해 나아간다. 반전의 내용보다 홍이의 행보가 사실 더 이해가 힘들다. 그런 충격적인 얘길 듣고도 유백과 월소에게 칼을 겨눈다는 설정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이다. 결국 충분히 감정의 과잉을 보여도 될 만한 캐릭터인 홍이는 오히려 감정을 최소화했다. 다만 감독이 설정한 스토리의 흐름에만 충실할 뿐이다. 이렇듯 유백과 월소는 과잉 감정으로 휘청거리고 홍이는 로봇처럼 스토리를 따라 움직이기만 한다. 이렇게 주요 캐릭터가 모두 흔들리는 동안 영화도 흐름을 잃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덧없는 덕기와 설랑의 사랑’과 ‘의미 없는 홍이의 복수’ 사이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