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소서.
그리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으소서.
마지막 과일들을 익게 하소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난여름 별로 더위를 타지 않던 나까지도 더위는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고통스럽기까지 했던 뜨거운 태양에 사과가 잘 익고, 배가 잘 익고, 포도가 잘 익었다. 포도로 만든 와인은, 짙은 와인은 위대한 태양이 만든, 태양의 음료, 신의 음료다. 그 와인이 내 혀끝에서 놀다 내 속에 디오니소스를 깨울 때 비로소 우리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집을 짓지 않아도 박탈감이 없는 영혼을. 오히려 자유롭게 떠돌 수 있는 영혼을.
그가 위대한 야성을 가진 사내 조르바,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 아니겠는가. 해 저무는 저녁 어느 바닷가에서 저녁놀을 따라 유랑하다 와인 한 잔 하고 산투르에 빠져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샐 수 있는 그는 심장이 반응하는 뭔가를 만나면 사랑하고 묻고 추구하고 발견하라고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 같다.
평생 ‘자유’가 화두였던 그를,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펼쳐 읽는데, 옛날에 그냥 스쳐 지나쳤던 대목에 내 시선이 머문다. 때로는 사랑하고 때로는 증오하고 때로는 지겨워하고 때로는 그리워하게 되는 여자에 대해 조르바가 되묻는 장면이었다.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여자란 무엇일까요? 왜 이렇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지요? 그는 남자나, 꽃핀 나무, 냉수 한 컵을 보고도 똑같이 놀라며 자신에게 묻는다.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것이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어찌 보면 별 것도 아닌 문장에서 나는 무릎을 쳤다. 거기에 사물에 대한 지식을 쌓는 대신 사물 자체를 음미하는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나 함께 살고 사랑하는 존재들에게 나는 얼마나 많은 관념의 그물, 편견의 그물을 던졌던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그래야 한다는 내 속박의 끈을 끊지 못해 그 끈으로 가족을 ‘가족’이라는 끈으로 포박하고 친구를 ‘친구’라는 끈으로 포박한 결과는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고, 욕심이었다.
자신이 가진 편견의 그물을 스스로 걷어내기 전에는 우리는 그를, 그녀를, 그것을 제대로 만날 수 없다. 그러니 조르바가 아무도,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화내지 마쇼.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소. 인간이란 짐승이요. 나는 오직 조르바만 믿어요.”
이것은 의심 많은 재벌이나 권력자의 말이 아니다. 편견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동물적 감각으로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온 자유인의 말이다. 나는 내게 묻는다. 너는 너를 믿을 수 있니? 너를 둘러싼 그 모든 것 없이도 자유로운 너를.
나는 생각한다. 오로지 나만을 믿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사람은 무엇보다도 삶이 소유가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일 것이라고.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