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웅 묘역에서 참극이…’ 그들 가슴에도 큰 상처
아웅산 묘역 입구에 세워진 대한민국 순국사절 추모비(위). 아래 사진은 묘역에서 바라본 양곤의 상징 ‘쉐다곤 파야’로 1983년 당시 방문단이 묘역 참배 후 이곳에 들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웅산 묘역 입구 석판에 쓴 한 구절이 마음을 울립니다. ‘추모비는 검은 주조색의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주변의 파고다와 아웅산 기념탑과 조화를 이룬다. 추모비 문구가 적혀 있는 벽 사이의 틈은 정확히 사건 현장을 가리키고, 우리는 그곳을 통해 고인들을 기리며, 그 의미를 간직한다.’
1983년 10월 9일 한글날. 오전 10시 28분. 대한민국 대통령의 차가 묘역과 약 1500미터 남겨둔 거리를 지나갈 때. 귀를 찢는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10시 30분으로 예정된 참배시간보다 몇 분 빠른 시간에 북한 공작원의 폭탄 테러사건은 발생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각료들, 수행원과 수행기자들은 비동맹국과의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서남아시아를 순방중이었습니다. 그날 영빈관에 머물던 대통령이 출발시간에 맞춰 내려왔는데 안내하기로 한 버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지 않아, 화가 난 대통령이 안으로 들어갔고 외무장관이 도착했지만 몇 분 더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 사이 이계철 주 버마대사가 먼저 영빈관을 나와, 태극기를 앞에 단 승용차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묘소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각료들과 수행원들은 이미 도열한 상태이므로 멀리서 보면 이 대사가 대통령처럼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얼마 후 버마 의장대의 진혼 나팔소리가 짧게 한 소절 울렸다가 그쳤습니다. 수행원과 기자들은 의장대가 연습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폭음이 터졌습니다.
비명, 울부짖음, 카펫을 적시는 낭자한 선혈, 무너져내린 천장, 화약냄새, 자욱한 연기와 먼지로 뒤덮인 현장. 이들의 시신은 얼굴을 보여주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이날 대한민국 대통령 수행단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버마 요인 7명이 사망하고 36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돌발상황으로 대통령은 살아남았지만 국민들의 신망이 두텁던 많은 각료들을 잃었습니다.
북한 테러범 3인은 인민무력부 산하 특수8군단 특공부대원들로 무역선으로 테러 한 달 전에 양곤항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북한 대사관 참사 집에 머물며 묘역을 지키는 경비병을 피하여 깊은 밤에 잠입하여 폭발물을 설치했습니다. 사건 이틀 전까지 3개의 폭탄을 설치했고 그중 1개가 폭발했다고 합니다.
테러범 3인 중 1명은 현장에서 추격중 사살되었고, 1명은 이듬해 사형이 집행되었고, 유일하게 생존했던 1명은 인세인 감옥에서 25년간 무기수로 복역중 중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나이는 53세였다고 합니다. 당시 아웅산 사건은 이 나라에 정보책임자가 해임된 시기에 발생했습니다.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독립운동의 영웅이자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도자입니다. 아웅산의 혼이 묻혀있는 이 성역에서 자행된 폭파사건이기에 미얀마 정부가 북한에 갖는 원망과 감정은 남달랐습니다. 미얀마 국민들에게도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단절된 북한과의 외교관계도 다시 회복되었지만 이 묘역은 개방하지 않았습니다. 사건 30년 만인 지난 2013년에야 개방했습니다.
묘역에 적힌 희생자들의 이름을 봅니다. 맨 마지막에 있는 이름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부장. 수행한 기자 중 유일하게 희생되었지만 14명의 중상자 중에는 8명이 기자들이었습니다. 손과 얼굴에 2도 화상을 입고도 현장소식을 전한 이도 있습니다. 이 중 연합통신 최금영 기자는 이때 중상을 입고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다 200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양곤의 병원시설이 열악해 피해도 컸고, 필리핀 미군기지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숨진 이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최금영 기자는 그날, 촬영각도와 거리를 미리 재기 위해 수행원과 마주보는 위치에서 이중현 기자와 같이 있었습니다. 셔터를 누른 몇 초 후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두 사람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최 기자는 이 기자를 구출하려고 움직이다 자신도 정신을 잃고말았습니다. 파편에 맞아 부서진 그의 카메라는 한국으로 왔고, 그 안에서 피묻은 필름을 현상하니 딱 한 장의 사진이 나왔습니다. 참사 몇 초 전 정면을 바라보며 서있던 각료들의 모습. 그 장면이 마지막 모습을 담은 유일한 사진이 되었습니다.
그해 가을이 생각납니다. 저는 고 이범석 외무부 장관 등 희생자들의 미망인들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런 아픔을 감당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신입기자인 저는 도저히 질문을 던질 수가 없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고 이범석 장관의 둘째 딸이 한 말이 국민들을 울렸습니다. “하나님이 17년 동안 저에게 좋은 아버지를 주신 것으로 감사할 수 있어요.”
지금은 희생된 각료들의 많은 자녀들이 국제기구나 세계평화를 위해 일하는 기관에 몸담고 일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래전 사건인지라 제가 이 나라 청년들에게 물어보면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설명해주면 부끄러워합니다. 이제는 한국에서 와서 영화촬영도 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정선교 Mecc 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고아를 위한 NGO Mecc 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