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떠밀려 차린 밥상 ‘영양가’ 없네…
정부 주도로 열린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가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빛 좋은 개살구’라는 평가를 받았다. 행사 첫 날인 지난 1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이 고객들로 붐비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매년 11월 마지막 주 금요일, 미국은 ‘블랙프라이데이’ 행사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추수감사절이 끝난 직후부터 연말까지 연중 최대 세일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고가의 전자제품부터 갓 출시된 신상품까지 대폭 할인을 실시하니 소비자들은 길게 늘어선 줄도 마다하지 않고 밤새 쇼핑을 즐긴다. 연간 소비의 약 20%가 이 기간 동안 이뤄질 정도다. 블랙프라이데이라는 명칭도 이전까지 지속된 장부상의 적자(red figure)가 흑자(black figure)로 전환된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이런 블랙프라이데이가 10월 1일부터 14일까지 국내에서도 처음으로 시행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소비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참여 업체마다 할인 품목과 세일 가격을 묻는 소비자들의 문의가 급증했고 행사가 시작된 지난 1일엔 오픈 시간에 맞춰 매장을 방문한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퇴근 후 롯데백화점 본점을 찾은 민 아무개 씨(33)는 “피곤하지만 블랙프라이데이를 진행한다기에 일부러 매장을 찾았다. 그런데 일반 가을 정기세일과 다른 점을 전혀 못 찾겠다. 신상품 세일은 거의 없고 이월상품이 대부분인 데다 인기제품은 10~20% 할인이 전부다. 구색을 갖추려 2~3년이나 지난 상품들까지 백화점에 진열돼 있으니 오히려 쇼핑할 분위기를 망쳤다. 멀리 찾아온 손님들이 살 게 없다며 직원들에게 화를 내는 모습도 여러 번 봤다”고 말했다.
유통업체들은 행사 첫날부터 쏟아지는 불만에 난감해하면서도 고객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출발부터 삐걱댄 행사였기에 예상했던 결과라는 게 업체들의 속내다. 대부분 참여업체는 “준비 기간이 충분하지 못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미국은 제조사를 중심으로 연초부터 블랙프라이데이 행사를 기획하는데, 우리 정부는 채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유통업계에 행사 계획을 알렸다.
한 참여업체 관계자는 “미국 블랙프라이데이를 벤치마킹했다는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이런 행사는 가격 결정권을 쥔 제조사가 나서야 한다. 출고가는 그대로인데 어떻게 유통업체가 할인 폭을 늘릴 수 있겠나. 하지만 고가의 가전제품, 전자기기, 가구 등을 생산하는 국내 제조사들은 워낙 덩치가 커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 결국 만만한 유통업체들이 모든 부담을 떠안게 된 것이다. 요즘 유통업계 전반이 면세점 입찰, 국정감사, 검찰수사 등으로 긴장하고 있어 어느 곳도 정부의 결정에 반기를 들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여업체 관계자는 “정부는 제조사가 아닌 유통업체에, 그것도 불과 20여 일 전에 행사 진행을 통보하다시피 했다. 유통업체들이 세일행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제조사와 함께 품목, 할인율 등을 논의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이 정도 규모의 행사라면 최소 3개월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정부 정책에 반할 순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갔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평소 행사보다 5~10% 할인 폭을 늘리거나 상품권을 제공하는 것에 불과한 블랙프라이데이가 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실제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에 참여한 업체들의 행사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존의 정기세일이나 이벤트성 프로모션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백화점은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혹은 코리아 그랜드세일이라는 이름 아래 가을 정기세일을 진행할 뿐이고 대형마트와 편의점에는 대부분 자체 브랜드(PB) 제품을 중심으로 ‘1+1’ ‘2+1’ 증정 이벤트만 가득하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행사를 준비한 한 백화점 관계자는 “매년 12월 진행하던 코리아그랜드세일이 정부의 시기 조절에 따라 지난 8월로 앞당겨져 한 차례 마케팅 계획 수정이 있었다. 지금도 코리아그랜드세일이 진행 중이라 이번 가을 정기세일 전단도 그에 맞게 만들었는데 갑자기 지난달엔 블랙프라이데이를 준비하라는 날벼락을 맞았다”며 “대형 현수막 제작에도 수백만 원이 소요되는데 전국에 배포되는 전단을 새로 만들고 처음부터 행사 기획을 다시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백화점 업체들은 기존 가을 정기세일 행사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객들의 불만도 이해는 되지만 우리도 답답한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뿐만 아니다. 급하게 진행된 행사다 보니 예상치 못한 피해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 편의점 점주는 “손님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블랙프라이데이 행사로 창고가 터져나갈 지경이다. 증정행사가 주를 이루니 갑자기 재고가 늘어 관리에 어려움이 있다. 아직 추석 관련 행사도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여서 더 정신이 없다. 우리 사정이 어쨌든 제품을 관리하지 못해 발생하는 피해는 고스란히 점주의 몫이니 힘들어도 참을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특히 대형마트는 의무휴업일 조정 문제로 난감해하고 있다. 당초 정부는 블랙프라이데이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대형마트의 의무휴업일 조정을 약속하며 대대적인 홍보도 마쳤다. 하지만 막상 의무휴업일 조정 권한을 가지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와 협의한 부분이 없어 일부 매장은 날짜 변경이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관할 구청으로부터 의무휴업일 조정 요청을 거부당한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물에도 의무휴업일이 조정될 것이란 안내가 나간 상태다. 당연히 조정이 될 줄 알았는데 몇 차례나 거부당해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방은 그나마 협조가 잘 되는 편인데 서울·수도권의 상황은 심각하다. 주말에 고객들이 가장 많이 찾을 텐데 소비자들을 위한 행사로 오히려 혼란을 빚게 됐다”고 말했다.
현장 속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는 소비자에게도, 참여업체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요란한 빈 수레’에 불과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