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양반도 코치 좀 해주시오 허허”
▲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늘상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고건 전 총리. 현실정치에 대한 질문에 그는 여전히 말을 아꼈지만 “어떻게 해야 옳은 길인지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좋은 말씀을 듣고 있다”며 애둘러 표현했다. | ||
고 전 총리는 최근 매스컴에서 ‘국민 후보’라는 또 하나의 별칭을 얻었다. 각 여론조사의 유력 대선주자 경쟁에서 한 번도 선두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현실 정치에 나서려 하지 않기 때문. 자연히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그를 만나고 싶어하고, 그는 가급적 피하려 드는 숨바꼭질이 계속되고 있다.
‘유력 대권주자’로 주변에서 한껏 부추겨 보건만, 그래도 그는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기자가 그의 사무실을 찾을 때마다 “찾아오는 손님을 물리칠 수는 없지만, 인터뷰는 사양한다”는 말을 확인한 다음에라야 자리를 권한다. 말도 극도로 아낀다. 이쯤 되면 ‘절제’가 아니라 거의 ‘침묵’에 가깝다.
그만큼 고 전 총리를 인터뷰의 장으로 이끌어내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편안한 식사 자리를 빌미 삼아 그와 마주한 것은 지난달 27일 정오께. 평소 그가 즐겨찾는 대학로 인근 골목의 한 한정식집의 구석진 방에서였다. 편안한 반소매 남방 차림으로 들어선 고 전 총리 손에는 큰 와인 한 병이 들려져 있었다. 순식간에 와인 두 병이 비워지는 사이에 고 전 총리는 제법 많은 말들을 기자에게 쏟아냈다. 하지만 역시 그의 완고한 ‘절제’는 술상 앞에서도 쉬 흐트러지지 않았다.
─박철언씨가 최근에 쓴 회고록을 읽어보셨습니까. 거기에 고 (전) 총리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는데요(박철언씨는 책에서 ‘86년 9월26일 전두환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장세동 안기부장 등과 함께 친위쿠데타 지시를 받았다. 내게 쿠데타 후 새로 채택하게 될 새 헌법을 준비토록 했다. 대통령의 지시대로 10월2일 안가에서 새 선거법안을 준비하기 위한 당간부와의 회동을 가졌다. 여기에는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과 김태호 사무차장, 그리고 고건 의원이 참석했다. 이틀 후 안가에서 내무부와 법무부의 실무진과 고 의원 등이 다시 모였다’고 밝혔다).
▲얘기만 들었어요. 내용이 정확히 뭐였지요?
─(기자가 책 내용을 설명한 이후) 당시 총리께서는 초선 의원에 불과했는데, 그 자리에 왜 끼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박철언씨가 기억을 잘못한 것 같아요. 내가 당시 초선이지만 당내에서 선거제도개선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었죠. 여야 합의로 88년 총선 이후부터 지금의 소선구제로 정착된 것이 바로 내가 당시 야당과 협상을 통해 이뤄낸 작품이었어요. 그와 관련해서 당시 어느 호텔에서 이뤄진 회의에 몇 차례 참석한 적은 있소. 그런데 박씨 말처럼 단 네 사람이 안가에서 헌법 관련 논의를 했다? 그것도 친위쿠데타와 관련된? 그런 기억은 전혀 없소. 박씨에게 다시 한번 정확히 확인을 해 보세요(실제 박씨는 이에 대해 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고 전 총리는 초선이긴 했지만 당내에서 법률안과 관련한 어떤 직책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차원에서 합류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쿠데타의 깊은 내막까지 알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5공 말기인 87년 6월 내무장관에 발탁된 이후에도 당시 ‘안가 회의’에 연일 참석하셨지요?
▲그랬죠. 그땐 하루에도 두세 차례씩 회의에 또 회의였어요. 그야말로 비상시국이었죠. 당과 청와대, 그리고 내각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죠. 안기부장과 보안사령관도 참석하고.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인 데모대를 해산시키기 위해서 경찰력을 투입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한번 논란이 됐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게, 당시 회의에서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는 이가 총리도 비서실장도 아닌 경호실장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한번은 따로 비서실장에게 “대통령 잘 좀 모셔요”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만약 그때 명동성당에 실제 경찰력이 투입됐다면 결과적으로 당시 내무장관이던 총리께는 큰 과오가 될 뻔했군요(87년 6월10일 민주화 항쟁의 와중에서 7백50여 명의 시위대들이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대피했다. 이들은 그곳에서 농성하며 5박6일 동안 성당 밖의 경찰 병력과 대치했다. 경찰의 강제 진압설, 공수부대 투입설 등의 긴박한 와중에 김수환 추기경 등이 적극 중재에 나서 결국 시위대는 구속자 한 명도 없이 자진 해산했다).
▲그렇죠. 당시 회의 때 경호실장의 말로 보면 대통령의 뜻은 ‘경찰 투입하라’는 것이었죠. 회의 주재를 안기부장이 했는데,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한마디씩 하도록 시켰단 말이오. 그런데 아무도 반대를 못해요. 대통령 지시사항이니까. 그러다가 뒤늦게 내 차례가 왔길래 내가 작심하고 얘기를 했어요. ‘만약 경찰력이 명동성당에 투입되면 엄청난 불행한 사태가 온다. 혹시라도 바티칸시국에서 한국상품 불매운동이라도 펼치게 되면 애써 쌓은 우리 경제는 무너진다. 또 국내의 혼란한 정세 때문에 올림픽을 반납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국가 이미지는 크게 타격을 받게 된다’라고 절대 불가의 뜻을 밝혔죠. 실제 당시 영국에서는 한국이 올림픽 보이콧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면서 런던을 대체 개최지로 은근히 내세우기도 했어요. 다들 내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이제 다음 문제는 대통령을 어떻게 설득시키느냐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날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가 열리기 이전에 안기부장이 먼저 들어가서 이런 내용을 전달하기로 했죠. 만약 안기부장의 보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다음엔 주무장관인 내가 직접 들어가기로 했고.
다음날 회의에 들어서는데 대통령 뒤를 따라 안기부장이 입장하더라구. 그러면서 뒤에서 내게 웃으면서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는 거야. 됐다, 이거지.
─결국은 총리의 뜻이 받아들여진 셈이 됐는데요. 당시 전 대통령은 총리께서 경찰 투입을 강하게 반대한 사실을 알았습니까?
▲물론이죠. 왜냐하면 그날 저녁에 전 대통령이 내게 직접 전화를 했어요. 좀 못마땅한 목소리로 “이봐. 고 장관. 지금 명동성당은 ‘해방구’야. 해방구. 알아? 당신들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라고 소리를 쳐요. 그래서 내가 “각하, 그래서 저희들이 국가적으로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 좋은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대통령이 “맨날 모여 앉아서 회의만 하면 뭐해? 모여 앉아서 물이나 마시고 헤어지고 말야”하며 막 역정을 내시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난 끝까지 ‘각하 분부대로 하겠다’라는 말은 안했어요. 그저 ‘좋은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라고만 계속 대답했지. 명동성당에 절대 경찰을 투입할 순 없는 거니까.
─그럼 결국 대통령의 뜻을 거역한 것 때문에 두 달 만에 내무장관직을 물러난 겁니까?
▲그건 아니오. 거기에는 또 다른 일화가 있어요. 일단 명동성당 사태는 평화적으로 넘어가고 결국 6·29선언이 나왔죠. 그래서 이제는 대선 정국에 접어든 거죠. 대선이 5개월밖에 안 남았으니까요. 선거를 치르는 주무 장관이 내무장관인데, 내가 당시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이면서 내무장관 겸직이었거든. 그래서 내가 대통령에게 찾아가서 건의했죠. “이제부터는 선거 정국인데 내무장관이 여당 소속 국회의원이라는 건 적절하지 못합니다. 제가 물러나야겠습니다”라고. 대통령이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더라고.
▲ 대통령 직무대행이던 지난해 3월14일 고건 전 총리가 충남 논산의 폭설 피해 농가를 찾아 복구작업을 돕고 있다. | ||
당시 경제부처 장관이었던 한 인사가 자신은 장관직을 계속 더 수행하고 싶다고 밝히자 대통령이 “그래? 그럼 그 봉투 다시 이리 내놔”하고 그에게 줬던 봉투를 다시 빼앗는 거예요(웃음). 결국 그 장관만 유임되고 나머지 의원 겸직 장관은 나와 함께 모두 물러났죠. 그 장관도 역시 장관직을 유지하는 대신 전국구 의원직은 내놔야 했어요.
─5공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교통장관에 발탁되는 등 5공 시절 장관만 세 차례나 임명되셨죠? 전 대통령과 무슨 각별한 인연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죠. 오히려 정반대요. 당시 신군부는 나를 좋게 보지 않았어요. 최규하 대통령이 79년 12월 취임하면서 내가 청와대 정무수석을 맡게 됐죠. 그런데 당시 정국이 너무 안 좋게 돌아가는 거예요. 연일 데모는 더욱 심해지고. 군부의 힘은 더욱 비대해졌죠. 그래서 80년 4~5월께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시국 건의서를 작성해서 최 대통령께 올렸어요.
‘그야말로 안개정국인데, 어서 빨리 이 안개를 걷어야 한다. 올해 내로 헌법 개정하고 선거 치러야 한다. 그리고 현직 군인이 중앙정보부장을 맡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더군다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까지 겸직하면 나라의 양대 정보기구를 한 사람이 독식하게 되는데, 그래선 안된다’ 하는 내용이었죠. 실제 당시 학생들 데모가 심해진 것도 전 사령관이 중정부장 겸직에 임명되면서 부쩍 심해졌어요.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가 막 터져나왔죠.
그런데 내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고 한계를 절감하고 사표를 내고 집에서 칩거했어요. 최 대통령은 사표 반려를 종용했지만 나는 끝내 고집을 버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게 신군부측에는 눈엣가시였던 거에요. 모두들 고분고분한데 일개 수석비서관 한 명이 반발을 하고 사표를 던지고 나가버렸으니….
이번에는 신군부측에서 사람을 보냈어요. 하나회 멤버였던 고명승씨가 찾아와서는 “군의 세 어른이 함께 일을 하고 싶어하신다”라고 말해요. 아마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씨를 말하는 듯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난 행정관료 출신이다. 공무원으로서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금과 같은 비정상적인 과도기에서는 내가 할 일이 없다”라고. 당시 그런 상황이었는데, 신군부가, 또 전 대통령이 나를 예쁘게 볼 리가 있겠어요.
심지어 당시에는 이런 소문도 돌았어요. 청와대 비서관 한 명이 마치 DJ와 무슨 연관이 되어서 전격 경질당한 것처럼 말예요. 당시엔 언론 보도도 제대로 안될 때였으니까. 그래서 내가 일일이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서 “근거없는 소문”이라고 해명을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결국 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교통부 장관으로 입각하셨죠?
▲“새 대통령이 취임했다. 정상적인 헌정 상태가 온 것 아닌가. 나라를 위해 봉사해달라”라고 입각 제의를 해오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었죠. 당시 난 정치인이 아니라 행정관료였으니까.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도 좀 소개해 주시죠.
▲34세 때 내무부 지방국장에 임명됐는데, 사실상 지방국장은 다음 도지사로 가는 교두보였어요. 그런데 내가 알기로 당시 나는 전남도지사 후보 3순위였어요. 내 앞에 1, 2순위가 있었는데, 박 대통령이 그걸 제쳐두고 내 이름에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렸다고 합디다.
▲ (왼쪽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전두환 전 대통령, 노무현대통령 | ||
당시 박 대통령이 비행기로 해외 순방을 하고 들어오면 대개 일본을 통해서 들어오는데, 하늘에서 우리 땅을 내려다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다는 거죠. 일본 산은 온통 푸른데, 우리 강산은 붉은 산이니까. 그래서 녹림사업을 장려했는데, 자꾸 실패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녹림사업도 새마을운동 방식을 도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현지를 직접 다니면서 녹림사업이 실패하는 원인을 찾아냈어요. 그리고 산림화에 성공했죠. 박 대통령이 대단히 기뻐하면서 30대의 새파란 보좌관에게 전국의 시도지사와 장관들 앞에서 브리핑을 직접 하게 했어요. 아직도 그 성공사례가 책자로 있어요.
─요즘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론’으로 온통 정국이 어수선합니다만.
▲글쎄요. 대통령의 뜻이 무엇일까요? 결국 내각제를 말하는 것 아닐까요?
─총리께선 어떻게 보십니까. 내각제에 대해서.
▲글쎄요. 뭐….
─유력 대선주자로서 너무 침묵만 하는 것도 좋은 모습은 아니라는 비판적 시각도 있을 수 있는데요.
▲난 아직 대선주자로 나선 적도 없는데…. 그리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다 한들 그게 이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무슨 도움이 될까요? 과연 도움이 될까요? 지금 상황에서?
─아직도 전직 총리로서 현 정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보는 건가요?
▲전직 총리로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임기가 아직 절반이나 남았는데, 벌써 차기 대권 운운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제 임기도 절반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연정론으로 정치권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좋은 말씀을 듣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옳은 길인지… 기자 양반도 내게 코치를 좀 해주시오(웃음).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