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무대응전략’ 점점 힘 빠진다
▲ 8월30일 홍천 의원연찬회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박근혜 대표의 모습.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애당초 연정의 주 대상인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롤러코스트에 탑승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노 대통령이 아무리 ‘당근’을 제시해도 연정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응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당 일각에선 노 대통령의 연정 발언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이 계속 연정론에 대해 무대응으로 일관할 경우 지역구도에 안주하는 기득권 세력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몇몇 의원들은 노 대통령이 굴 속에 들어간 ‘너구리’를 잡기 위해 계속 연정론의 군불을 지필 경우 한나라당이 결국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노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롤러코스트에 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래에서 멍하게 쳐다볼 수만도 없는, 한나라당의 ‘연정론 딜레마’를 짚어보았다.
“둑이 넘치는지 안 넘치는지는 둑 위에 있는 자만이 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 말이다. 현재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발언 퍼레이드에 대해 정치권의 분분한 해석이 있지만 그 의중을 아는 사람은 노 대통령 자신뿐일 것이다. 대통령의 연정론에 대한 진정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현재 정치권은 노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치밀한 시나리오, 또는 ‘덫’에 서서히 말려드는 양상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6월 ‘11인회의’에서 했던 자신의 연정 발언이 한 여권 인사의 ‘누설’로 언론에 보도된 것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고 알려진다. 자신의 연정 로드맵이 여당의 보안 의식 부재 때문에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노 대통령이 최근의 연정 정국을 6월 이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이 연정론을 왜 제기하는지는 이제 중요한 논쟁거리가 아니다. 지역주의 청산을 위한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일 수도 있고, 야당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권력 재창출과 부진한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한 ‘9회말 만루홈런’일 수도 있다. 연정 정국의 핵심은 노 대통령이 경제난과 색깔 없는 정책으로 인해 힘없는 대통령으로 몰릴 위기에서 벗어나, 연정이라는 화두를 정치권에 던짐으로 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런데 ‘정치 9단’ 노 대통령의 연정 정국을 대하는 한나라당의 대응 수준은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6월24일 여권의 당·정·청 ‘11인회의’에 참석, 야당과의 연정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이때 한나라당의 첫 반응은 매우 감정적이었다. 전여옥 대변인은 “노 대통령 특유의 오기 정치다.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맹형규 정책위의장도 “노 대통령이 과거엔 자신감이 넘쳐서 실수를 하더니, 요즘엔 자신감이 약해진 것 같다. 대통령의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났다. 노 대통령은 연일 ‘권력을 통째로 내놓겠다’, ‘2선 후퇴와 임기 단축도 생각해봤다’는 등의 충격적인 발언을 쏟아내며 연정론 군불 지피기에 적극 나섰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요지부동,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그 파열음은 한나라당 내부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맹형규 정책위의장이 “대연정 제안은 한나라당의 분열과 고립화를 꾀해 집권 연장을 위한 새 정치판을 만들려는 음모”라고 분석하며 “연정 기만극에 맞서려면 노 대통령과 무능한 현 정권의 집권 연장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세력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빅 텐트’ 정치연합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제3정책조정위원장인 이종구 의원도 “한나라당이 ‘달밤에 뭐 짖는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고, 전략통인 홍준표 의원도 “노 대통령의 ‘복선’을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소장파들의 의견도 적극적이다. 남경필 이성권 의원 등은 “노 대통령의 연정 제안 자체는 정략적이고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그런 제안을 하는 이상 당내에서도 검토는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기 개헌에 대해 적극 검토해보자”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박근혜 대표측의 즉각적인 ‘진압’ 때문에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노 대통령이 쳐 놓은 연정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연찬회에 참석했던 맹형규 의원도 “연정론의 함정들을 미리 파악해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표가 지난 8월15일 광복절 경축행사장에서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 의원의 말은 최근 노 대통령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노 대통령은 최근 “지역주의 구도를 넘어서 대화의 정치 한번 해보자는 것이 핵심 메시지인데 계속 외면할 수 있겠느냐. 이 문제는 그저 안 받으면 그만이라는 자세로 오래 버틸 수는 없는 문제다. 대의와 명분이 있는 얘기인데 한나라당에서 언젠가는 응답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응답을 하지 않는 한 정치적 수세 국면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파격적인 연정 제안이 처음에는 정치권에 큰 충격을 줄 것이지만 갈수록 여론은 자신의 ‘화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으로 본 것이다.
한 언론사의 논설실장이 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주장했던 ‘에펠탑 효과’도 노 대통령의 ‘기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인사는 “에펠탑을 건설할 땐 파리 시민들이 격렬히 반대했지만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없던 우호적인 반응도 늘어나 급기야 파리 서정의 극치란 칭찬이 나왔다. 최근 대통령이 언론인들과의 간담회,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대연정 구상을 설명하다보니 최소한 선거제도 개편 논의는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듯하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대연정 구상과 지역구도 극복에 대한 대의에 국민들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는 발언이다.
한나라당도 연정에 대한 여론의 변화를 실감한다. 그래서 9월 초 노 대통령과 박 대표의 회동 때 연정도 주요 의제에 포함시킬 것을 동의했다고 전해진다. 한나라당의 무대응 전략에 변화가 오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박 대표측은 “노 대통령이 선거구제 개편, 개헌, 임기 단축 등 연정 방안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새 카드를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겠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 또한 “두 번 얘기하면 안 들어주고 열 번 얘기한다고 들어줘서 되겠느냐”고 말한 바 있다. 연정에 대해서만은 배수진을 친 셈이다. 그럼에도 박 대표가 연정은 받을 수 없지만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선거제도 개편 문제에 대해서는 정기국회에서 논의해 볼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먼저 여론이 점차 이성적인 논의를 해보자는 쪽으로 선회할 경우, 한나라당의 초기 무대응 전략은 실패작이란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두 달여 동안을 허송세월한 셈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한나라당이 대연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우리) 당으로서는 소연정이나 정책공조 실현 가능성 등의 측면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실패한다 하더라도 민주당 민노당 등과의 소연정은 자연스레 그 발판이 마련될 것이라는 의미다. 그렇게 될 경우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 중심의 거대 정치 연합체에 둘러싸인 채 지역구도에 의존하는 수구세력이라는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의원은 “최근 노 대통령의 언행을 보면 연정을 제안만 하고 그대로 물러나지만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노 대통령은 지역주의 구도를 깰 것을 강조하면서 결국 선거구제 개편으로 정국을 몰고갈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해득실 계산을 해서 연정에 대한 당의 세밀한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대응이 상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나라당 연찬회에 강사로 나선 정치컨설팅그룹 ‘민’의 박성민 대표도 “한나라당이 현 구도에서 가장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은 이슈의 선점이다. 노 대통령의 연정론에 대해 무응답으로 일관하다가는 자칫 이슈를 여당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며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백번 양보해 노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롤러코스트’를 탄다고 해도, 국민들은 과연 그 ‘정치게임’을 어떻게 볼까.